[매경의 창] 문제는 여성이 아니다

2023. 3. 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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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성 정책' 유연근무제
육아 주체를 여성만으로 보고
특혜 주고 있다는 착각 유발
사내 복합적 차별로 이어져
문제는 여성이 아니라 사회

3월 8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이날 서울에 위치한 유엔여성기구 성평등센터에서는 57개국 외교사절단이 모여 한국 여성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디지털 세계의 발전이 여성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전문가 발표도 있었다. 행사는 진지하고 열띠게 진행됐지만 국내에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렇게 국제사회에서 중요시하는 날에 대해 한국이 비교적 무관심한 것을 보면서 한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무관심의 배경에는 한국의 여성 문제는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증거는 차고 넘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의 출산율, 결혼과 출산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경력 단절, 남녀 간 현격한 임금 차이, 유엔 등 국제기구가 발표하는 성평등지수에서 한국이 항상 꼴찌인 점이 그렇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번지수가 틀렸다. 지난달 발표된 출산율 현황이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을 보고 정부는 늘 그래 왔듯 여러 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시간제 근무의 확산이다. 어린 아동을 육아하고 있는 직원의 경우, 기존의 근로시간 단축이나 탄력근무제 외에도 재택근무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코로나를 거치며 근무 형태가 매우 다양해진 지금의 추세를 따라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정책으로 출산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유연근무제는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여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여성의 육아 부담을 덜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은 여성들에게 최선의 근무 조건을 부여하고자 하는 '착한' 생각을 가지고 이 정책을 구상했을 것이다.

이 정책은 일견 여성을 위한 특혜로 보이지만, 실제로 여성들이 이 제도를 많이 사용하면 회사 내에서 여러 단계의 복합적인 차별을 받을 것이다. 아이가 이미 있는 여성이 어쩔 수 없이 그 제도의 도움을 받게 되더라도, 그녀의 회사 내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최고경영진과의 접촉이 줄어들고, 승진에서 멀어지게 된다. 물론 그런 길을 가는 게 괜찮은 여성들도 있다. 이런 정책이 섣불리 시행된다면 소위 말해 여성을 다시 집에 앉혀 놓는 효과를 가지고 올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결과는 출산율을 더욱더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한국 여성들은 출산과 커리어의 갈림길에 섰을 때 커리어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 아이를 낳고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은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수많은 '착한' 여성 정책이 과거에 실패를 거듭한 것이다.

이러한 유연근무제는 육아의 주수행자를 여성으로 보고,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방향으로 시행돼서는 그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육아를 장려하고자 하는 정책은 여자의 행동만을 조정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가정과 육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 위에서 시행돼야 한다. 즉 남성도 여성만큼이나 가정과 육아의 주체라는 인식, 가정과 육아는 커리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인식,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개입해 도와줘야 한다는 인식. 그러한 인식이 먼저 사회 전반에 공고히 뿌리내린 후에 유연근무제가 시행된다면 남자든 여자든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이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에게 특혜를 달라고 여성의 날을 기리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여성이 아니라 사회 전반이라는 인식을 해야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손지애 이화여대 초빙교수·외교부 문화협력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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