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KT 대표 뽑는데 `메신저`가 사라졌다

김나인 2023. 3. 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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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내부인사 배제" 압박에도
정권바뀌면 직권남용 처벌 우려
공무원 '정권 메신저' 역할 포기
교통정리 못하고 메시지만 난무
사외이사 "우리보고 어쩌란거냐"
사진 = 연합뉴스

"정권이 바뀌면 직권남용혐의로 감옥에 갈 수 있는데 어떤 공무원이 총대를 매고 산하기관 인사에 간여할 수 있겠어요?"

한 중앙부처 1급 공무원의 얘기다. 공공기관과 공기업, 소유분산기업의 대표 물갈이를 놓고 파열음이 잇따르는 가운데 공무원 조직은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다. 몇번의 정권 교체기를 겪은 공무원 조직은 더이상 정권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보니 인사의중을 전할 '메신저'는 없고, 정권의 압박이 담긴 '메시지'만 난무한다.

특히 정부 지분이 없는 KT 같은 소유분산 기업은 이사회가 움직이지 않는 한 정부의 메시지도, 메신저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KT 차기 대표 후보 선정을 두고 여당이 "사장 돌려막기 반대"를 외치며 내부 인사 배제를 주장했지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국민을 약탈하는 이권 카르텔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며 연일 금융·통신업종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쏟아낸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KT 차기 대표 선출과정에 직접 교통정리를 하지 못하고 간접적인 메시지 압박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은밀하게 메신저를 통해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서다.

문재인 정부의 일명 '블랙리스트 사건' 때문이다. 문 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전임 정부에 임명된 산하기관장에게 강압적으로 사직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며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처벌대상이 됐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은 사법처리됐고,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유영민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등은 재판을 받고 있다.

이런 처벌이 윤 정권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누구 하나 KT 차기 대표 선출 과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면 형사처벌 리스크를 떠안는다. 권력의 최상층부마저 인사 컨트롤타워 없이 중구난방으로 메시지를 남발하는 형국이다. KT 대표를 추천하는 사외이사중 일부는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냐"는 볼멘 목소리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KT에서는 정권과 통하는 사외이사가 주로 메신저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 상황이 꼬인다. 전 정권의 인사가 대표 선임과 연임에 입김을 발휘하는 구조가 되기 때문. 이번 대표 선임 과정에서도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강철 전 사외이사가 집중 공격을 받아 중도 사임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MB 정부 당시 '고소영(고대·소망교회·영남)', 문재인 정부에서는 '캠코더(캠프 출신·코드인사·더불어민주당) 인사'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낙하산 인사가 만연했다. 조직 내에 파벌이 심화되고 정권이 바뀌면 인사폭풍이 불어닥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KT 전 대표들은 줄줄이 검찰수사를 받았다. 남중수 전 대표는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에서 연임이 결정됐지만 검찰수사를 받아 구속된 후 사의를 표명했다. 이석채 전 KT 회장 역시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 연임을 확정했지만, 검찰 수사 끝에 사임했다. 황창규 전 KT 회장은 연임 후 임기를 끝까지 소화했지만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당시 황 회장은 정치인 낙하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대표 후보 심사기준에 '기업경영 경험' 항목을 추가했다. 이어 2020년 3월 취임한 구현모 대표의 취임 일성은 "KT그룹을 외풍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기업으로 만들겠다"였다.

주인없는 민영화의 후유증을 겪는 KT 같은 소유분산기업에서 이사회를 통한 '셀프추천'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윤경림 KT 차기 대표 후보는 8일 지배구조개선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대표 선임절차, 사외이사를 비롯한 이사회 구성을 손보겠다고 밝혔다.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현황을 분석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주요 주주의 의견을 수렴해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 모범 모델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과거의 관행대로라면 진작 기존 대표를 정리하고 친정권 성향의 인사를 앉혔겠지만 블랙리스트 사건 후로는 불가능해졌으니 정부·여당이 공개적으로 압박을 하는 것"이라며 "결국은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인사들의 버티기와 이들을 내보내려는 현 정부의 권력투쟁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미경·김나인기자

the13oo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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