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김연아-아사다 마오' 못지 않았던 레전드 명승부

권종오 기자 2023. 3. 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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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스포츠+] ‘은반 위에서 펼쳐진 피겨 전쟁’ 역대 최고의 명승부들


세계 피겨스케이팅에 손꼽히는 라이벌이 있다면 누가 먼저 머리에 떠오르나요? 대략 2005년부터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까지 약 10년간 ‘피겨 여왕’ 김연아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는 치열한 경쟁을 펼쳤습니다. 물론 결과는 김연아의 완승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출전하는 경기는 은반 위의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도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를 떠올리게 하는 피겨 명승부가 있었습니다. 바로 19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말이지요. 
 

브라이언의 전쟁

브라이언 보이타노

1988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은 피겨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데요. 은반 위에서 놓치기 아까운 두 개의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소개할 전쟁은 이른바 ‘브라이언의 전쟁’입니다. 남자 싱글의 강력한 우승후보는 미국의 브라이언 보이타노와 캐나다의 브라이언 오서였는데요. 브라이언 오서는 우리도 잘 아는 2010 밴쿠버올림픽 당시 김연아의 코치였던 인물입니다. 그 역시 당대 최고 스타였습니다. 오서와 보이타노, 두 선수는 이미 캘거리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 1986년 세계피겨선수권에서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1986년에는 보이타노가 금메달, 오서가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이듬해 세계선수권에서는 정반대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서가 금메달, 보이타노가 은메달이었습니다. 두 선수의 실력은 막상막하,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오서가 캘거리 올림픽 금메달에 더 가까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일단 올림픽이 오서의 홈인 캐나다에서 열리고, 주니어 시절까지 포함해 역대 전적에서 오서가 5승 2패로 앞서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림픽 개막 3개월 전 캘거리 링크에서 열린 대회에서 오서가 보이타노를 꺾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캐나다 국민이 오서에게 거는 기대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캘거리올림픽 개회식에서 캐나다 기수를 오서에게 맡길 정도였습니다.
 

캘거리에서 다시 만난 두 브라이언

브라이언 오서

캘거리올림픽 남자 피겨 금메달의 주인공은 빼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오서인가? 파워풀한 점프의 소유자 보이타노인가? 세계 피겨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쇼트 프로그램까지는 보이타노가 아주 근소하게 앞섰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배점이 높은 프리스케이팅에서 충분히 뒤엎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선수가 우승한다는 뜻인데요. 상상을 초월하는 심리적 압박 속에 보이타노가 먼저 은반에 섰습니다. 장기인 트리플 러츠를 비롯해, 트리플 플립 등 모든 점프를 완벽하게 뛰었고, 생애 최고의 연기를 해냈습니다.
이어 오서의 차례가 됐습니다. 홈팬들의 열광적인 환호성 속에 은반에 들어섰습니다. 음악이 흐르자 첫 번째 점프인 트리플 러츠를 깔끔히 뛰며 산뜻하게 출발했습니다. 이어 두 번째 연속 점프도 멋지게 해냈습니다. 캐나다 홈팬들은 오서가 금메달을 딸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지요. 바로 이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의욕이 너무 앞섰을까요? 아니면 직전에 보이타노의 완벽한 연기를 보고 난 뒤 엄청난 압박감을 느껴서였을까요? 오서가 세 번째 점프인 트리플 플립을 하다 뼈아픈 실수를 하고 맙니다. 공중 동작은 좋았지만 착지가 흔들린 것이지요. 몇 년 동안 트리플 플립 점프를 수없이 멋지게 뛰었지만 하필 결정적인 순간에 착지를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찬 관중석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지요. 오서는 이후 나머지 과제를 큰 실수 없이 마무리했고 특유의 예술성도 발휘했지만 점프 실수 하나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 끝 차이의 실수가 메달 색깔을 바꾸다

잠시 후 심판의 점수가 발표됐습니다. 9명의 심판 가운데 5명이 보이타노가 우세했다고 판정했고 4명이 오서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5대 4, 단 1명 차이로 보이타노가 금메달, 오서는 은메달이었습니다. 점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서가 땅을 칠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두 심판은 나란히 합계 11.7점으로 동점을 매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규정에 따르면 동점일 경우 예술점수보다 기술점수가 앞선 선수를 승자로 판정하게 돼 있었습니다. 두 심판 모두 보이타노에게 기술점수 5.9점을 준 반면 오서에게는 5.8점을 매겼습니다. 결국 0.1점 차였습니다. 만약 오서가 트리플 플립 착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5.9점이 됐을 것이고 금메달도 오서의 차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점프 실수 하나가 모든 것을 무산시킨 것이지요. 오서는 경기 직후 “죄송합니다. 캐나다”라고 울먹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카르멘의 전쟁

데비 토머스

또 다른 전쟁은 ‘피겨여제’인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와 미국의 흑인 샛별 데비 토머스가 일명 ‘카르멘의 전쟁’을 펼친 것입니다. 1986년 세계선수권에서 토머스는 그때까지 2회 연속 세계선수권자인 비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했는데요. 그러면서 두 선수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게 됐고, 올림픽까지 오게 됐습니다. 이 강력한 우승후보 두 사람의 프리스케이팅 주제곡은 공교롭게도 같았는데요. 바로 그 유명한 비제의 ‘카르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피겨 역사상 최초의 흑인 챔피언이 나올 것인가? 아니면 비트가 2회 연속 올림픽 정상에 설 것인가? 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요. 당시 쇼트프로그램까지는 토머스가 1위였습니다. 하지만 강심장으로 유명한 비트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권종오 기자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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