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산골분교서 이어진 두 기자의 20년 인연

김성후 기자 입력 2023. 3. 7. 22:49 수정 2023. 3. 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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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기자상 시상식서 다시 만난 강재훈 사진가·원석진 G1 기자

“아저씨! 저 서울가요.” 석진이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지난달 초였다. 뭔 일이냐고 물으니 한국기자상 받으러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다. “아빠도 오니? 외삼촌도 오고?” 무슨 기사로 상 받았냐고 물어봄 직한데, 강재훈 사진가는 석진이 가족을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오래전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스쳐 지나갔다. 22년 전 방동분교의 가을 운동회날, 석진이는 흰 바통을 움켜쥐고 다부지게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재훈 사진가와 원석진 G1 기자의 인연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겨레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폐교 직전의 분교를 찍으러 전국을 다니던 강 사진가는 자신의 아이들을 기린초등학교 방동분교에 보냈다. 4학년 아들은 석진이 형 석배, 1학년 딸은 석진이와 같은 반이었다. 석진이는 그의 아이들과 여름엔 강가에서 물놀이하고, 겨울엔 비료 포대를 타고 눈 덮인 언덕길을 내려왔다.

지난달 22일 열린 제54회 한국기자상 시상식에서 강재훈 사진가(사진 왼쪽)와 원석진 G1 기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재훈 제공

전교생이 20명이 채 될까 말까 하고 한 학년이라야 대여섯 명에 불과한 산골 학교였다. 학부형들도 그 마을에서 나고 자라 그 학교에 다녔다. 소풍날이면 농사용 트럭으로 아이들 실어나르고, 운동장이 질퍽거리면 트럭으로 흙을 실어다가 쫙 깔았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던지 강 사진가는 더더욱 방동분교를 떠나지 못했다.

방동분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서울로 오고서도 강 사진가는 원 기자 가족과 관계를 이어갔다. 학교 행사가 있거나 마을의 대소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한 달에 평균 두 차례 정도 방동마을에 갔다. 농사일 거들고, 새참도 나눠 먹고, 사진을 찍고, 가족사도 듣고, 그렇게 20년 넘게 친밀하게 지냈다.

2001년 강원도 인제 방동분교 운동회에서 계주경기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원석진. /강재훈 제공

원 기자에게 강 사진가는 “이웃 어른”이었다. 분교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과도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아저씨, 그래서 외지인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도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불이라도 지펴서 함께 식사하곤 했다. 그래도 궁금증은 있었다. 강원도 인제가 고향도 아닌 분이 이 산골에 왜 계실까?

신문 배달도 안 되는 산골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 석진이가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처음 떠올린 직업은 기자였다. “왜 그런 결심을 했을까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건 아저씨 덕분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제게 ‘최초의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아저씨와 같은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피어올랐다.

강원도 산골 깡촌에 살던 그 아이는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으로 자랐고 2019년 6월 G1에 입사했다. 합격자 발표 당일 원 기자는 강 사진가에게 전화를 걸어 아저씨 덕분에 기자가 됐다고 했다.

기자를 꿈꾸던 대학생 원석진이 2018년 한겨레신문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 /강재훈 제공

“너무 대견하더라고요. 대학 다닐 때 기자 되고 싶다며 연락이 와서 한겨레 편집국 구경도 시켜주고 그랬는데, 진짜로 기자가 됐잖아요. 괜히 제가 큰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원 기자의 아버지는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석진이 저놈은 형 보고 기자 됐어. 그러니 형이 책임져야 돼”라고 한단다. 인사치레로 하는 빈말이어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강 사진가는 2020년 6월 30년의 분교 작업을 정리한 <들꽃피는 학교, 분교> 사진전을 열며 “나와 분교에서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서 제각각 이름에 어울리는 꽃과 나무로 성장해 있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꽃과 나무로 성장한 아이들 가운데 석진이가 있었고, 석진이는 기자가 되었다. 20년 넘게 이어온 남다른 인연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석진이가 어떤 기자가 됐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욕심을 내려놓지 않되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기자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원석진 기자에게 똑같이 질문했다. “괜찮은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과한 욕심을 내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기자, 소외된 이웃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자, 제가 생각하는 괜찮은 기자입니다. 어쩌면 아저씨가 말씀하신 착한 기자와 같은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제54회 한국기자상 시상식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원 기자 아버지, 외삼촌, 외숙모 등도 함께였다. 원 기자는 수상 소감 마지막에 “마흔둘 나이에 혼자서 삼 남매를 키우신 저희 아버지께 한국기자상의 영광을 모두 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 사진가는 사진첩을 떠올렸다. 그 사진첩에는 석진이 어머니 장례식, 석배 결혼식 전날 밤 텅 빈 마당에 쓸쓸하게 서 있던 석진이 아버지, 그리고 석진이 외할아버지가 딸과 사위, 외손주들과 개울에서 천렵을 하며 활짝 웃는 사진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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