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이라도 모이길” 바랐던 깡통전세 피해자의 죽음

이정규 기자 2023. 3. 7.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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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6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열린 추모행사 가보니…대책위 “대책 재발방지 중심, 피해자 구제방안 빠져”
2023년 3월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남광장 택시 승강장 앞 광장에서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시민대책위원회가 고인이 된 피해자 ㄱ씨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시민들이 얼굴 없는 고인의 영정사진 앞에서 추모하고 있다.

2023년 3월6일 오후 5시40분께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남광장 택시 승강장 앞 광장.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국화꽃을 준비하고 초를 놓고 현수막을 세웠다. 검정 배경의 현수막에는 ‘전세사기 피해자 고 ○○○님 추모제’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2022년 12월부터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시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ㄱ(38)씨를 기리고자 모인 피해자들은 삼삼오오  화환을 놓았다.

피해자 ㄱ씨는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에서 2021년 10월부터 2023년 3월 초까지 1년5개월 넘게 홀로 살던 남성이다. 그는 근저당이 설정된 집에 보증금 7천만원의 전세계약을 맺고 입주했다. 계약 당시 근저당과 전세보증금을 합쳐도 시세보다 낮다는 공인중개사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ㄱ씨는 최근 ‘건축왕’ 사건이 불거지며 시세가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ㄱ씨는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자들을 만나며 보증금을 못 돌려받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ㄱ씨는 계약 당시 6500만원 이하로 설정된 소액보증금 최우선 변제대상보다 높은 7천만원으로 계약을 한 터라, 변제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행에 찾아가 전세자금 대출 연장도 문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라는 이유였다.

그는 유서에 “더는 못 버티겠다. 자신이 없어. 뭔가 나라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고… 이게 계기가 되서 더 좋은 빠른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썼다.

전세금 못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알게 되자…

이날 퇴근 시간인 오후 6시30분부터는 피해자 조현기(45)씨가 지하철 입구 계단에서 내려오는 시민들에게 빌라를 지은 남아무개 회장 일당 전원을 구속해 달라는 탄원서 서명을 받았다. 현재 남 회장만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시민들은 조씨를 지나쳤다. “아 눈물나, 눈물 나올거 같아.”(조씨)

광장에는 노래 ‘내 영혼의 바람 되어’가 울려펴졌다. “그곳에서 울지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대책위에서 파악한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사태’ 피해주택은 60여채 2700여세대에 피해인원은 5천명여명 이른다. 피해자들은 피해구조의 정점에 ㅅ건설 남아무개 회장이 있다고 본다. 남 회장은 2013년부터 미추홀구에서 나홀로 아파트와 빌라 등을 지었다. 피해자들은 남 회장의 계열 건설사들이 지은 주택을, 이들과 한패가 된 공인중개사들이 소개하고, 공통된 관리업체가 빌라 관리를 했다고 파악한다. 남 회장은 미추홀구에서 주택임대사업으로 번 돈을 강원도 동해경제자유구역 망상 제1지구 개발사업에 썼다고 알려졌다. 동해 개발사업은 진척되지 못했고 금리는 올랐다. 남 회장이 2022년부터 대출이자를 갚지 못하자 피해자들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남 회장 일당이 신축 주택의 시세를 부풀렸다고 본다. 이 때문에 세입자들은 주택에 잡힌 근저당과 전세금을 합치더라도 주택 시세보다 낮다고 판단해 전세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장은 이날 “이번 사건은 건축왕이라고 불리는 건축주를 비롯해, 부동산 임대인 공인중개사와 관리사무소까지 다 모두 짜고 저지른 조직적 사기”라고 말했다.

2023년 3월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남광장 택시 승강장 앞 광장에서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시민대책위원회가 고인이 된 피해자ㄱ씨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피해자들이 인천 시민들에게 탄원서 서명을 받고 있다. 

깡통전세 피해자는 사회적 재난 속에서 산다

집회 시작 시각인 저녁 7시, 어느덧 200여명의 촛불을 든 시민들이 작은 광장을 꽉 채웠다. 시민들은 한명씩 고인의 영정을 올린 자리에 걸어가 국화꽃을 놓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했다. 유가족의 의사에 따라 이름도 얼굴도 없는 까맣게 색칠된 영정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대책위는 2023년 3월2일 낸 보도자료에서 유가족과 추모를 위한 공론화 방식 등을 논의했지만 장례절차 등을 비공개로 진행하자는 유가족의 뜻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아울러 “지금도 수많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힘들게 모은 전 재산을 잃고 전세대출 상환 압박을 받거나 길거리로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며 “정부와 국회, 그리고 인천시의 대책은 재발방지 중심이고 현재 발생한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방안은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2023년 3월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남광장 택시 승강장 앞 광장에서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시민대책위원회가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100여명의 시민이 하나둘 추모를 마치기 시작할 무렵, 집회 사회자를 맡은 김병렬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 부위원장이 추도사를 읊기 시작했다. “고인의 가시는 길을 기리고자 추모를 진행하며 여러분들을 조촐하게 모신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고인은 같은 처지에 놓인 분들을 위해 먼저 대화를 했고 정부의 정책 개선을 위한 토론회 등에서도 적극적인 의사반영 등을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했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울먹였다.

김태근 변호사(세입자114 운영위원장)도 이날 추모제에 들려 준비한 추도문을 읽었다. “돌아가신 분이 (깡통전세 피해) 토론회에 참석했다고 전해들었다. 조금 더 희망적으로 이야기 할 걸….”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고개 저은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전세금은 대부분 세입자가 이 생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만든 삶의 종잣돈이다. 전세금 돌려받지 못할 때 세입자 생명력이 크게 흔들린다. 본래는 집주인이 대출받아 집을 사고 이 집을 세입자에 임대를 줘야하는데 대한민국은 어느 순간부터 세입자가 돈을 받아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준다. 전세사기와 깡통전세 피해를 당한 세입자는 현재 사회적 재난 속에서 산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2023년 3월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남광장 택시 승강장 앞 광장에서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시민대책위원회가 진행한 추모행사에서 고인이 된 피해자 ㄱ씨를 기리며 촛불로 집 모양을 바닥에 그렸다.

피해자 조씨는 이날 집회가 끝나는 저녁 8시20분까지 지나가는 시민들을 불러 세우며 서명을 요청했다. “어머님. 돌아가시는 길에 서명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쁜 데 안 써요.” 길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서명을 했다. 다른 할아버지는 손을 올리며 “화이팅입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갔다. 이날 서명에 동참한 시민들의 수는 300여명이다.

“작은 손이라도 모여 큰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ㄱ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대책위 피해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대책위는 3월8일 저녁 6시30분 서울역에서 용산 대통령실까지 추모 행진을 할 계획이다.

인천=글·사진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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