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 공포, 가장 먼저 대학가 덮쳤다
3高에 ‘비대면’ 선호 문화·학령인구 감소 등도 악재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가 대학 상권부터 집어삼키고 있다. 코로나19 엔데믹과 신학기 개강이라는 호재에도 대학 상권엔 찬바람만 쌩쌩 분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이른바 '3고'의 여파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모습이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코로나19 사태 이후 치솟던 서울 지역 주요 상권의 공실률이 지난해 4월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를 기점으로 어느 정도 회복 국면에 들어섰으나, 대학가는 여전히 암울하다.
잘나가던 신촌·이대, 홍대·합정 상권 '휑'
특히 대학가 소규모 가게들이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부동산원의 지난해 공실률 통계를 전수 분석해 보니 4분기 기준 홍익대·합정(10.9%), 숙명여대(10.5%), 건국대(9.9%), 신촌·이화여대(9.0%) 등의 소규모 상가(2층 이하이고 연면적 330㎡ 이하) 공실률은 서울 평균(6.2%)과 전국 평균(6.9%)을 훌쩍 뛰어넘었다. 코로나19 발생 전인 2019년 4분기(구 표본 기준) 홍대·합정(7.3%), 건대(0.0%), 신촌(0.0%) 등의 소규모 매장 공실률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신촌·이대와 홍대·합정의 경우 지난해 4분기 중대형 상가(3층 이상 또는 연면적 330㎡ 초과)와 집합상가 공실률에서도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중대형 상가는 홍대·합정 12.2%, 신촌·이대 9.1%(서울 평균 9.1%), 집합상가는 홍대·합정 13.0%, 신촌·이대 18.4%(서울 평균 8.1%)를 각각 기록했다.
지난해 2분기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로 억눌렸던 소비심리가 분출된 영향은 대학 상권까지 미치지 않았다. 숙대(3.2%→10.5%)와 건대(0.0%→9.9%), 혜화동(대학로·0.6%→3.6%), 성신여대(2.4%→3.5%) 등의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지난해 1분기보다 4분기에 오히려 높아졌다. 명동(42.1%→21.5%), 광화문(12.7%→0.0%), 강남대로(22.0%→0.0%), 압구정(17.1%→0.0%) 등 다른 주요 상권 소규모 상가의 공실률이 드라마틱하게 내려간 것과 대비된다.
오는 4월 부동산원이 발표할 올 1분기 공실률 통계는 더욱 악화된 대학 상권의 현주소를 보여줄 전망이다. 2월말 직접 둘러본 신촌·이대, 숙대 등 상권은 개강을 맞은 기대감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리의 인파나 만석인 가게는 찾아보기 힘들고 '임대 문의' 안내판을 써붙인 공실이 부지기수였다. 1월30일부터 시행된 실내 마스크 의무 착용 해제 조치의 효과 역시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상권 자체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르포] 슬럼화되는 신촌·이대 상권 "행인 없어 밤엔 혼자 다니기 무서워요" 기사 참고)
대면 수업 전환 이후로도 굳이 안 모여
이화여대 학보사 '이대학보'는 학교 앞 상권에 관한 2월27일자 기사에서 "유동인구가 적어 상권이 침체한 것은 물론 도로변과 골목길을 가리지 않고 공실이 늘었다. 이에 상인, 부동산, 재학생, 구청의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며 '백약이 무효할 정도'라는 인근 공인중개소 대표의 하소연을 전했다. 한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숙명여대 앞 거리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문 닫은 상가가 태반이다. 닭꼬치를 파는 상인이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놀라더라"는 글이 올라와 많은 이의 관심을 모았다.
앞서 코로나19로 대학들이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면서 대학 상권은 주요 고객인 학생들을 잃었다. 공실이 늘어나고 상권은 급속히 황폐화됐다. 대면 수업이 재개된 지난해 2학기 이후로도 학생 손님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다. 성신여대에 재학 중인 이현령씨(가명·24)는 "학교에서 비대면 활동이 표준이 됐기 때문에 소수든 다수든 대면으로 만나는 경우는 드물어졌다"며 "언젠가부터 혼자 가는 단골 식당이나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외에는 학교 앞 가게를 거의 이용하지 않게 됐다"고 전했다. 아울러 비대면 수업을 거치며 태블릿에 교재(전자책)를 담고 필기까지 하는 수업 형태가 일반화한 영향으로 대학 앞 인쇄·출판업체들은 줄폐업 중이다.
고물가와 공공요금 인상에 지갑 닫은 학생들
그러나 대학생들이 학교 앞 상권을 이용하지 않는 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크게 작용한다. 물가 상승과 공공요금 인상 러시는 대학생 소비자와 그들을 상대로 가게를 꾸려 가야 하는 소상공인 모두를 한층 위축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이 2월21일 발표한 '2월 소비자동향 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자들의 물가 전망에 해당하는 기대인플레이션율이 두 달 연속 올라 다시 4%대에 진입했다. 황희진 한은 통계조사팀장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월 다시 5.2%로 높아진 데다 공공요금 인상이 줄줄이 예고되면서 '물가가 쉽게 낮아지지 않겠다'는 예상이 늘어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교통비, 난방비에 자취방 월세와 등록금까지 오르는 상황을 맞닥뜨린 대학생들은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지난 1년 사이 서울 주요 대학가의 보증금 1000만원 이하 원룸(전용면적 33㎡ 이하) 월세 평균이 10~30% 정도 오른 것으로 부동산 중개 플랫폼 다방은 파악했다. 이화여대 앞은 1년 전 50만원대 초반에서 60만원대 후반으로, 연세대 앞은 40만원대 후반에서 50만원대 중반으로 뛰었다.
더 큰 부담은 등록금이 들썩거린다는 점이다.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에 따르면 전국 191개 대학 중 6.3%인 12개교가 올해 들어 등록금을 올렸다. 대학의 등록금 인상은 2009년 이후 처음이다. 다른 대학들의 인상 움직임도 가시화하고 있다. 2월5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대학 총장 114명 중 56명(49.12%)은 올해나 내년 중 등록금을 올릴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고질적인 운영난과 물가 급상승세를 감안할 때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게 대학들의 입장이다. 대학교육연구소 관계자는 "내년 등록금 법정 인상률 한도 예상치(5.5%)를 적용하면 사립대 평균 등록금이 최대 42만원 오를 것으로 보인다"면서 "올해 물가가 크게 오른다면 실제 등록금 인상률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방대 상권 공실률은 더 치솟아
학생들의 소비가 쪼그라들고 고정비는 치솟는 상황에서 대학가 가게들에 버틸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버텨낸 곳들도 최근의 상황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얼마 전엔 1997년부터 이대 앞 명물로 통해온 한 분식집이 더 이상 운영난을 견딜 수 없어 오는 5월 문을 닫기로 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서울이 이 정도인데, 불경기 영향을 더욱 많이 받는 지방대학 상권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주요 지방대 상권의 경우 중대형 상가 공실률이 두드러지게 높았다. 전남대(30.6%)와 울산대(30.2%)가 30%대, 계명대(25.1%)와 부산대(24.8%), 충북대(20.6%)가 20%를 넘는 등 전국 평균(13.2%)을 크게 뛰어넘는 곳이 많았다.
지방대 상권은 입학생 감소까지 겹쳐 위기가 더해졌다. 학령인구 감소 추세 속에 지방에 있는 대학보다 수도권 소재 대학으로 학생들이 몰려 지방대 입학생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대학교육협의회와 종로학원 등에 따르면 전국 164개 4년제 일반대가 2023학년도 대입 추가모집으로 1만7561명을 선발했는데, 이 중 90%가량은 비수도권 대학에 몰려 있었다. 추가모집 최종 마감일인 2월28일까지도 정원을 채우지 못해 원서를 받고 있는 60개 대학 가운데 80%(48개)가 지방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속화하는 인구구조 변화 속에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학교들도 결코 안심하기 어렵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서울 소재 대학의 올해 대입 추가모집 인원이 지난해의 2배 수준으로 늘어난 것을 두고 "통합수능에 따른 문·이과 교차지원과 의학계열 쏠림 현상 등에 따른 수험생 도미노 이동, 학령인구 감소 등 복합적인 요인 때문에 수도권 대학마저 신입생 모집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됐다"고 분석했다. 결국 대대적인 상권 개편을 통해 대학생 외 손님도 유치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게 고사 위기에 처한 대학 상권의 유일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 올해 성장률 1.6%로 하향…R의 공포 더욱 가시화
R의 공포는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2월23일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에서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1.6%로,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3.5%로 내렸다. 앞서 한은은 지난해 11월 경제전망에서 올해 우리 경제가 전년 대비 1.7% 성장하고 소비자물가는 3.6% 상승할 거라 전망했다. 그러나 지난해 4분기 우리 경제가 2년 반 만에 역성장하는 등 경기 둔화 조짐이 본격화하자 3개월 만에 다시 성장률 전망치를 조정했다.
지난해 4분기 실질 GDP는 전기 대비 0.4%(속보치) 감소해 2020년 2분기(-3.0%) 이후 10분기 만에 처음으로 역성장했다. 올해 들어 경기 둔화 조짐은 더욱 뚜렷해졌다. 올 1월 수출은 1년 전보다 16.6% 줄어들었다. 지난해 10월부터 4개월째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1월 무역적자는 월간 기준 역대 최대인 126억5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한은의 올해 경제전망을 부문별로 살펴보면 상품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3.1%에서 올해 0.5%로, 상품수입 증가율은 4.6%에서 -0.2%로 각각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내수의 순성장 기여도는 지난해 1.9%포인트에서 올해 1.3%포인트로, 수출의 순성장 기여도는 0.7%포인트에서 0.3%포인트로 각각 낮아질 전망이다. 민간소비는 실질구매력 둔화, 원리금 상환 부담 증대 등으로 회복세가 완만해져 올해 2.3%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해 민간소비 증가율은 4.4%였다.
수정된 한은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현대경제연구원(1.8%), 국제통화기금(IMF·1.7%) 등에 비해 낮고 아시아개발은행(ADB·1.5%), LG경영연구원(1.4%), 주요 해외 투자은행 9곳의 성장률 전망치 평균(1.1%)보다 높다. 정부(1.6%)와는 같은 수준이다.
국내 경기에 대한 기획재정부의 우려도 점점 커지는 모습이다. 기재부는 2월17일 발표한 '최근 경제동향(그린북) 2월호'에서 "물가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이어가는 가운데 내수 회복 속도가 완만해지고 수출 부진 및 기업 심리 위축이 지속되는 등 경기 흐름이 둔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재부는 지난해 6월 그린북에서 '경기 둔화 우려'를 언급한 이후 최근까지 비슷한 평가를 해왔다. 그러다 지난달 그린북을 통해 '경기 둔화 우려 확대'로 좀 더 어두운 진단을 내놓은 데 이어 결국 이달에 '경기 둔화'라고 못 박았다. 코로나19 충격 이후 경기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경기 둔화 상황을 공식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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