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국민연금은 작전세력입니까?
한 사모펀드가 있다고 해보자. 이 사모펀드가 상장사 A사의 경영 성과를 인정받은 경영진에 대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교체를 요구했다고 가정하자. 그 와중에 뒤로는 기업 주식을 팔아 주가를 떨어트렸다면? 분명 증시 참여자들은 “의도가 분명한 주가 조작과 다름없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례와 똑같은 일이 증시에서 일어났다. 바로 국민연금이 주인공이다.
1998년 증시에 입성한 KT는 지난해 상장 후 처음으로 매출 25조원, 영업이익 1조6901억원이라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기록했다. 구현모 대표가 3년간 재임하는 동안 주가는 2배 이상 뛰었다. 최대주주인 국민연금도 3년간 총 1563억원의 배당을 챙겼고, 주가 상승 수혜를 누렸다. 하지만 구 대표는 뛰어난 경영 실적을 거뒀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표직 연임에 실패했다. 국민연금이 CEO 선임 절차의 공정성을 문제 삼아 제동을 건 탓이다.
국민연금이 막아서자 경영 리스크가 부각되며 KT 주가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12월 3만8000원까지 찍었던 주가는 최근 3만원대로 떨어졌다. 국민연금은 KT를 압박하는 사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팔아치웠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KT 주식 약 550만주를 매도하며 지분율을 기존 10.63%에서 8.53%로 낮췄다고 공시했다. 큰 손이 쥐어 흔들고, 주가 하락까지 주도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KT 대표이사를 바꿀 명분을 만들고자 일부러 주가를 떨어뜨렸다(팔았다). 사실상 세력과 같다”고 지적한다. 국민연금 해명대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들, 기업을 공격하는 동시에 주식을 팔았다는 인과관계만 따져보면 ‘오비이락’만 떠오를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연금이 처참한 수익률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는 지난해 국민연금 기금 운용 수익률이 마이너스 8.22%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연말 기준 적립금은 890조5000억원으로 내려갔다. 한 해 동안 손실 금액은 79조6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국내 주식 수익률이 마이너스 22.8%로 가장 나빴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7% 안팎을 차지해 시장을 흔드는 고래와 다름없다. 대주주로 있는 기업에 주주권을 행사하면 기업 경영의 방향이 갈리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기금 운용의 합리성을 제고하고자 2019년부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위탁운용사에 의결권 위임하고 있다. 국내 주식의 지난해 연간 기준 평가액은 125조4000억원 정도인데 이중 절반은 위탁사가 운용하고, 절반은 직접 운용한다.
다만 ‘사회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전제 하에, KT와 같이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곤 한다. 위탁운용사가 자금을 운용해도 의결권은 국민연금에서 판단하는 방식이다. LG화학, SK이노베이션, 포스코 등 물적분할 등 주주 권익 침해 논란이 일었던 사안들에 대해서 국민연금이 나서 의결권을 행사한 바 있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KT, 포스코, 금융지주사 등 특정 대주주가 없는 기업의 경우,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로 경영진이 바뀌어 정권마다 구설에 휘말리곤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혼선을 방지하고자 전체 의결권 행사 위탁운용사 판단에 위임하고 있다. 국민연금과 성격이 비슷한 일본 공적연금(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GPIF)은 2014년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는데, 이후 채권을 제외한 모든 주식을 은행 신탁이나 민간 운용사들에 맡기고 있다.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 역시 장기적인 수익만 고려한다는 전제하에 위탁운용사에 위임하고 있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 노르웨이 은행투자위원회(GPFG) 등도 기금 운용은 정부와 독립된 별도 기구에서 담당하거나 외부 운용사에 위탁한다.
국민연금 역시 어떠한 세력에도 영향받지 않고, 독립된 기관으로 철저히 수익률만 따져 움직여야 한다. 주식을 위탁운용사에 맡겼다면, 의결권도 마찬가지로 위탁사가 행사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민연금이 기업에 엄포를 놓는 사이 위탁운용사가 주식을 판다면, 국민연금이 진심으로 국민의 자산을 위하고 있는지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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