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0. 신라의 왕릉을 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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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경주. 기원전 57년 그곳에서 나라를 열어 삼국을 통일하고 천 년을 지속했던 신라. 1대 왕인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명의 왕위가 이어졌다.
8세기 세계 4대 도시는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중국의 장안(서안), 이슬람제국의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의 서라벌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라벌에는 17만9천 여 호(戶)가 있었으니 호당 5~6명으로 계산하면 서라벌의 인구는 90만~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신라 왕릉 간산에 앞서 드는 생각.
조선풍수의 비조(鼻祖)는 도선(道詵, 827~898)이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그러나 필자는 도선이 아닌 자장(慈藏, 590~658)이 진정한 조선풍수의 비조라고 주장한다. 도선보다 170여년 앞서 갔던 자장이 소점(所點) 다수의 천하대지급 적멸보궁이 그것을 증명한다. 도선은 고려의 개창을 예언하고 조언했으니 왕조의 정통성 홍보를 위하여 알리고 이용한 측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개국과 관련한 무학(無學, 1327 ~ 1405)의 경우도 유사하다 하겠다.
풍수지리는 7·8세기 중국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필자가 신라왕릉을 돌아보니 이땅의 풍수는 중국에서 유입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초대 왕으로 알려진 혁거세의 오릉부터 시작한다.

혁거세릉. 탑동.
신라의 초대 왕릉답게 외관상의 위용도 웅장하지만 풍수파워는 훨씬 좋은 곳이니 왕조의 개창군주 능묘로 손색이 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으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赫(爀)居世)라고 지었다.

오릉에는 시조 박혁거세 이외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고 한다. 물론 또 다른 설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전면에 있는 혁거세릉은 40회절 명당이니, 신중국을 개창한 중국의 마오저뚱(毛澤東)의 조부 묘소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풍수역량이다. 뒤에 있는 묘소들의 풍수파워도 38~34회절 명당이니 신라가 개국초에 나라의 기초를 닦는데 많은 풍수적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알영정(閼英井). 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곳. 혁거세릉에서 150여 미터 떨어진 곳의 여기(餘氣)에 해당하지만 21회절 대명당이다.

탈해왕릉. 동천동.
유일한 석씨 왕의 릉이다. 석탈해는 신라 중심부에 초승달 모양의 땅을 보자, 초승달은 반달이 되고, 또 차올라서 보름달이 되는 명당으로 생각한다. 기지를 발휘하여 호공(瓠公)의 땅을 빼앗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미 그 당시에도 명당에 대한 관념이 유통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명당을 훔쳤던(?) 석탈해, 그의 묘소도 상당한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

천마총(天馬塚). 황남동.
신라 제 22대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 1973년에 발굴되어, 천마도·금관·금모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곳이다. 유물 중에는 순백의 천마(天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천마도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불린다. 37회절의 대명당에 자리한다.

천마총의 관곽(棺槨). 시신을 안치했던 관곽의 정중앙이 핵심 혈처에 해당한다. 510년 경의 신라의 풍수실력이 놀라울 뿐이다.
천마총 옆에 있는 황남대총은 흉지에 해당한다. 천마총이 면배(面背)의 면에 자리하는 반면 황남대총은 배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법흥왕릉. 효현동.
신라의 제 23대 왕. 지증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위는 재위는 514 ~ 540년.
517년,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였다.
520년, 율령(律令)과 관제를 반포하였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불교를 국교로 정하여 불교정신에 의한 통치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명군(名君)으로 평가 받았다. 34회절의 대명당에 정확히 모셨다.

선덕여왕릉. 배반동.
신라 제 27대 왕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재위는 632 ~ 647년. 진평왕의 딸로 부친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634년,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었다.
636년 3월,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5월에는 백제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군사를 보내 이를 무찔렀다.
638년 10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오자 대장군 알천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했다.
642년 7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여 개성을 함락하고 당항성을 공역하자 당(唐)에 구원을 청했다. 11월에는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자 고구려에게 동맹을 청했으나 고구려는 오히려 김춘추를 감금하였다.
643년 9월, 김유신이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에도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3월에는 자장법사의 건의로 황룡사탑을 세웠다.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 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의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
여인으로서 남자도 감당키 어려운 많은 전쟁을 치러낸 여걸이라 할 만하다.
장사(葬事)를 모신 곳은 33회절의 대명당이다.

무열왕릉. 서악동.
신라 제 29대 왕.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43회절의 대명당이니 오늘날의 카카오 선영의 주혈과 비교할 만한 풍수파워이다.

서악동 고분군의 제1묘. 무열왕릉 뒤쪽.
무덤의 주인에 대한 추정은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무열왕릉의 여기(餘氣)에 자리하지만 29회절의 대명당이다.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金仁問, 629~694)과 9대손 김양(金陽, 808~857)의 묘소.
두 묘소는 무열왕으로 진입하는 맥로에 걸린 대흉지다. 대명당 근처에는 대흉지가 있다는 필자의 주장이 고금(古今)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열왕릉 맥로도.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김인문과 김양의 묘를 경유하여 무열왕릉에 엄청난 대명당을 맺는다. 뒤에 있는 서악리 고분군들은 무열왕릉의 여여기(餘氣)에 자리하지만 또한 대명당들이다. 맥로를 차가 다니는 도로에 비유하면, 명당은 차가 운행을 멈추는 정거장같은 곳이다. 맥로가 지나는 곳에 자리한 김인문과 김양의 묘소가 흉지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신문왕릉. 배반동. 재위는 681 ~ 692년이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했다.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했다.
687년 5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689년 1월, 동력 징발이 가능한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여 왕권강화를 이뤘다.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신문왕릉에서 34회절의 대명당을 맺었다.

성덕왕릉. 조양동.
신라 제 33대 왕. 35년의 장기간 재위기간(702 ~ 737)을 통하여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으로 꼽힌다. 그는 증조부인 태종무열왕을 롤모델로 삼은 듯하다.
714년에는 대당 외교 문서를 담당할 통문박사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717년에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算博士)를 창설해 의학과 수학을 장려하였다.
722년에 실시한 정전제도는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자영농민의 토지소유를 인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수의 증가로 국가재정의 안정을 가져왔다.

원성왕릉. 괘릉리.
신라 제 38대 왕. 괘릉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연못이 있어 유해를 수면상에 걸어 안장하였을 것이라는 속설에 의한 것이다. 선덕왕 1년(780년), 이찬(伊飡)으로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고, 이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했다. 묘소는 43회절의 대명당에 자리한다.

괘릉 전면의 무인상은 아랍사람을 연상케 하니, 신라는 당시에 중동지역과도 교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왕릉. 안강읍 육통리.
신라의 제 42대 왕으로 재위는 826~836년이다. 828년 1만여 명의 병졸로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했으며, 같은 해 차(茶)의 종자를 지리산에 심게 했다. 모든 관등의 복색을 달리하여 골품 간의 계층구별을 엄격히 했고 사치풍조를 금하는 교서를 내렸다. 30회절의 명당에 자리한다. 아쉬운 점은 대명당의 묫바람을 전해줄 후사가 없자, 오히려 사후에 왕위 다툼이 발생한 점이다.
신라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천년왕국을 이어갔다. 오랜 역사를 이어갈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뒷받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 분야의 근거와 자료는 학자들의 몫이지만, 풍수적으로는 대명당에 자리한 왕릉들이 신라왕조의 장구한 명운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56명의 왕이 재위했으나 그 능의 주인공이 확인된 것은 31개소 36기의 능묘라고 한다. 필자가 간산한 능묘는 일부분에 해당하니 풍수적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산이 높고 기세가 웅장하다고 풍수파워가 강한 것이 아니다. 평지에 자리하지만 대명당에 모신 신라의 왕릉, 풍수적 시각으로 왕릉을 돌아보는 것도 경주 여행에 특별한 맛을 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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