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의한·미동맹사] 보빙사 파견, 한·미 교류의 시작

2023. 3. 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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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이듬해인 1883년 5월 미국의 루셔스 하우드 푸트 초대 특명전권공사가 조선에 부임했다.

당시 미국이 대부분 국가에 영사를 파견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 중국, 일본과 동급의 최고위 외교관을 파견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1888년 미국 정부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퇴역한 윌리엄 다이 준장 등 4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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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이듬해인 1883년 5월 미국의 루셔스 하우드 푸트 초대 특명전권공사가 조선에 부임했다. 당시 미국이 대부분 국가에 영사를 파견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 중국, 일본과 동급의 최고위 외교관을 파견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조선도 주미공사를 파견해야 했으나 수교 직후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청의 간섭이 심화해 어려움을 겪었다.
1883년 7월 조선은 외교관 대신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한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란 이름으로 파견했다. 보빙사는 뉴욕을 방문하여 체스터 아서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양국 간의 우호와 교역에 대해 논의하였다. 당시 미국 신문에 한글로 작성된 국서가 소개되며, 한글의 존재가 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조선은 갑신정변 등 국내의 혼란한 상황으로 외교관 파견을 미루다 1887년 박정양을 주미 전권공사로 보냈다.
미국을 방문 중인 보빙사 일행.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 양성이 좌절되자, 1883년 10월부터 장교를 양성하고 근대식으로 군대를 훈련하기 위해 미국에 군사 교관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1888년 미국 정부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퇴역한 윌리엄 다이 준장 등 4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조선은 국내 최초의 사관학교인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고 이들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군사교육을 시작했다.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제1조에 명시된 ‘거중조정(居中調停)’에 대해 동상이몽을 했다. 조선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조선이 외교적 위기에 빠지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중재에 나서 줄 것을 기대하며 미국과 연대하는 조·미 동맹을 꿈꾸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국력은 관련된 모든 지표에서 세계 최강이었다. 다만 1823년 먼로 독트린 발표 후 반세기 이상 고립주의를 유지함으로써 국제정치에 대놓고 개입하지 않았다. 미국은 ‘거중조정’ 공약에 대해 조선의 독립과 영토 보존에 대한 정신적·외교적 지지를 표하는 것뿐이지 조선의 주권과 독립을 물리적으로 보호해준다는 공약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05년 7월 일본 가쓰라 다로와 나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르게 되는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현재 국방부 장관) 윌리엄 태프트 간 밀약이 맺어지며, 조선과 미국과의 국교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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