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강제징용 일본 책임’ 결국 덮는다

유신모 기자 2023. 3. 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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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 변제’ 방안 6일 발표…피고기업 배상 책임 묻지 않고 ‘독자 해법’
일 사죄 표명도 과거 담화로 갈음할 듯…피해자·시민 “굴욕 외교” 반발
얼마나 기다려야 제대로 된 피해배상 받을까 ‘제3자 변제’ 방식을 주요 내용으로 한 정부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해법 발표를 하루 앞둔 5일 시민들이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지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풀기 위한 해결책을 6일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 기업들이 낸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대신 배상하는 ‘제3자 변제’가 주요 내용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이 고법 판결을 뒤집고 피해자에게 개인청구권이 있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이후 11년 가까이 이어진 논란은 결국 일본 측의 주장대로 일본 피고기업들에 배상 책임을 묻지 않고 ‘국내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귀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발표하는 해결책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자금을 받은 국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한 기부금으로 재원을 조성하고 이를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 15명에게 지급한다는 것이 골자다.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이 같은 해결 방식을 추진하면서 일본 피고기업들이 기부금 조성에 기여하고 일본 기업이나 정부의 적절한 사죄 표명 등 ‘성의 있는 호응’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일본 측이 이 같은 요구에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한국의 독자적 해결로 가닥을 잡게 됐다.

이에 따라 일본 피고기업들은 정부의 해결 노력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일본 측의 사죄 표명도 기시다 후미오 현 내각의 입장이 아닌 과거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에 나온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재확인하고 ‘이를 계승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갈음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피고기업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다른 기업들이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에 돈을 내는 방식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 기부금도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미래청년기금’(가칭)을 조성해 공동운영하는 방식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일본의 ‘호응 조치’는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뤄지는 셈이어서 일제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적시하고 배상하도록 한 한국 대법원 판결 취지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게 됐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5일 강제동원 문제 한·일 협상과 관련해 “마무리 단계”라며 “한·일 청년세대·미래세대들이 양국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잠재력을 축적해나갈 수 있을지에 관해 양측 경제계라든지 다양한 분야에서 기여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강력 반발·‘3자 변제’ 법적 문제 남아…정부에 부메랑

외교적 갈등 일단락되며 한·일 정상 간 ‘셔틀외교’ 복원 전망
정부, 4월 미국·일본 방문…5월 히로시마 G7 참석 적극 추진
시민단체·야권 대정부 투쟁 예고…양국 관계 부담 계속될 듯

조선 청년들이 탄광 노역한 군함도 일본 나가사키현 섬 ‘하시마’에 1916년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주택이 부식돼 있다. 일본의 해상 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라고도 불리는 이곳엔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동원돼 해저 탄광 채굴 작업에 참여했다. 사진은 2016년 8월 모습. 이준헌 기자
조선인 묻은 자리, 묘비 대신 돌멩이로 일본 규슈 지쿠호 지역의 폐광 인근에 있는 무명 조선인 돌멩이 묘비 옆에 누군가 가져다둔 술잔이 놓여있다. 일본은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탄광에서 사망하면 대충 묻은 시신 위에 아무 돌멩이나 올려 묘비를 대신했다. 사진은 2016년 8월 모습. 이준헌 기자

정부의 이번 발표로 한·일 간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판결 문제로 인한 외교적 갈등은 일단락될 것으로 전망된다. 강제동원 판결 문제로 비롯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불안정한 지위도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일 정상 간 상호 방문 등 ‘셔틀외교’를 복원하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안보·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해결책 발표와 함께 윤 대통령의 4월 내 일본·미국 방문과 5월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이처럼 일본의 호응 조치를 포기하고 강제동원 판결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한 명분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이다. 과거사 문제에 발목이 잡혀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한·일 협력에 장애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의 부당성, 일본의 올바른 역사인식 등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발표로 한·일 정부 간의 갈등 요소는 해소할 수 있게 됐지만, 강제동원 문제가 모두 끝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윤석열 정부의 이번 결정은 고스란히 국내 정치적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부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야당 등이 정부의 해결책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정부 투쟁을 예고하고 있어 극심한 국내적 혼란이 예상된다. 또한 제3자 변제로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의 법적 권리가 충족되는 것인지, 정부의 대리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들의 채권을 합법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지 등의 법적 문제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이 같은 국내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강제동원 문제는 ‘해결했으나 해결되지 않은’ 현안으로 남아 다시 한·일관계에 계속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주고 국민의 분노만 키울 잘못된 합의는 역사적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굴욕적인 합의를 강요하려면 차라리 발표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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