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나라가 가장 상큼한 때

한겨레 2023. 3. 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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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하늘 천에 땅 지 말고, 이슬 로(露)에 땅 지(地). 두음법칙을 적용해 ‘노지’라고 쓰는 이 단어는 제주에서 일상적으로 쓰인다. 딱 맞는 뜻은 아니지만, 늘 아침이슬을 맞을 수밖에 없는 야외나 자연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노지귤은 말 그대로 하우스 같은 시설 없이 자연의 기후를 온몸으로 견디며 맺은 열매다.

10월 초부터 나오는 극조생이 감귤철의 시작을 알리고, 11월 중순에 조생귤이 나온다. 자연의 흐름에 맞춰 수확되는 귤로선 가장 이른 수확이어서 제주에 노지귤이 유통되기 시작하면, 이제 귤의 시절이 시작되는구나 싶다.

귤수확철은 제주 사람들에겐 농번기가 된다. 직접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는 친척들에게 손을 보태든, 다들 몹시 바빠서, 귤수확철에 중요한 행사를 잡으면 질타를 받기도 한다. 노지귤을 다 먹어갈 즈음 만감류의 시즌이 온다. 수확 시기가 1, 2월로 늦어 늦겨울부터 초봄까지 내내 즐기는 만감류는 한라봉을 대표 주자로 천혜향, 진지향, 써니트, 레드향, 청견까지 다양하다. 귤에 비해 2~3배는 크고 맛도 진한 만감류는 값도 비싸다.

디자이너로 일하던 친구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한라봉 비닐하우스에서 올해 첫 수확을 했다. 봉우리가 잘 올라온 게 농협에 납품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데, 귀한 상품으로만 한 봉지나 얻었다. 아직 후숙이 덜 되어 맛있게 신 과즙이 입안 가득 퍼진다.

제주도 사람들은 귤을 사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대체로 사실이다. 사서 먹지 않기 때문에 내 입에 들어가는 건 주로 파치(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다. 흠이 나서 상품이 안된 귤이나 만감류는 제주에 넘치고, 넘친 분량만큼 섬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순환한다. 맛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크기가 작거나 모양이 삐뚤어져서, 얼룩이 생기거나 흠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상품이 되지 못한 것들이다. 개인적으론 약간 못생기고 크기도 제각각인 파치귤이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도 귤이나 만감류를 사서 먹지는 않는다. 사서 직접 ‘먹지는’ 않지만, 선물은 한다. 귤철이나 한라봉철이면 육지에 사는 고마운 분들에게 친구네 농장에서 나온 귤이라며 한 상자씩 보낸다. 한번은 육지의 도심에 사는 친구에게 귤 한 상자를 보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친구에서 “제주에서 지인이 보내준 귤이야”라고 자랑했더니, 상대방 친구가 “귤은 원래 제주에서 오는 거야”라고 했단다.

맞다. 귤은 원래가 주로 제주에서 오는 것이지만, 제주에서 친구가 엄선한 농장에서 나오는 귤 중에서도 상품만으로 추려달라 부탁해 보내는 귤은 특별함이 남다르다. 마트에서 사 오는 제주산 귤과는 차원이 다르다. 똑같은 밭에 똑같은 농부가 농사를 해도, 나무마다 위치마다 귤맛이 다르단다. 진짜 맛있는 귤은 밭주인만 아는 셈이다.

노지귤이나 만감류가 수확되면 어떤 경로를 거치든 집에, 책상 위에, 차 안에 노지귤이 한 봉지나 한 상자씩 실려 있다.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한두 줌 쥐여 보내기도 하고, 오며 가며 내가 먹기도 하고, 그러고도 다 못 먹어 썩어 버리기도 한다.

때로 귤을 줘도 안 먹는 상황도 생긴다. 식당이나 카페 같은 가게 입구에 귤을 한 상자씩 두고 무료로 집어가라고 써둔 것을 보신 적이 있는지. 이는 관광객 손님들을 위한 서비스다. 제주도민들은 집에도 차에도 직장에도 제철 귤이 공급되기 때문에, 입가심용 서비스귤에 좀체 손을 뻗지 않는다. 노지귤이 수확되고, 만감류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기까지 10월 즈음부터 3월까지, 제주도는 온갖 종류의 감귤 향연이 벌어진다. 공기 중에 시트러스 향이 떠도는 것 같다. 당연히 냉장고에도 귤이 떨어지는 일은 좀체 없다.

3월이 지나면?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하우스귤이 있다. 과연 귤나라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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