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식이라더니 ‘자위 방지’가 목적?··· 단골 아침메뉴의 두 얼굴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3. 4.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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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11] “막아야 해...반드시...그들의 ‘자위행위’를.”

1877년 미국 미시간주의 한 요양원. 말쑥하게 생긴 한 젊은 의사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환자들의 ‘은밀한 손장난’(?)을 막을 방법을 고안하는 데 무딘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헝가리 화가 미하일 지히가 1911년 그린 ‘Masturbacja’.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성욕과 식욕은 만악의 근원이자, 건강의 적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자위행위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견고한 믿음도 있었지요. 이 두 욕망을 절제시킬 수 있다면, 요양원에 모인 미국 최고 부호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깊은 믿음을 토대로 식욕(과 성욕) 억제를 위한 메뉴 개발에 나섭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시리얼의 일종 콘플레이크의 시작입니다. 이를 개발한 젊은 의사의 이름은 존 하비 켈로그. “호랑이 힘이 솟아난다”는 콘플레이크의 시작이 “자위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켈로그의 ‘숭고한’(?) 목적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아침 식사의 대명사 시리얼.
그는 왜 ‘자위’를 막을 메뉴에 혈안이었나
“매춘과 욕망의 구덩이인 미국을 구하자”

젊은 의사 존 하비 켈로그가 ‘엉뚱한’ 자위혐오자인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성욕과 식욕이 건강을 해친다는 생각은 점점 인기를 얻는 보편적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1881년 29살의 존 하비 켈로그를 그린 초상화. 1881년 작품.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19세기 미국은 매춘과 육식, 과도한 음주가 만연한 사회였습니다. 세상이 욕망에 빠져들수록, 이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는 사람도 늘어나는 법이지요. 미국은 청교도(Puritan)들이 세운 나라인 만큼, 하나님의 본래 뜻대로 살아가자는 목소리도 그만큼 높아졌습니다.
“술이 인간을 마신다.” 화가 나다니엘 커리어가 1846년 그린 ‘The_Drunkard’s Progress‘. 알코올에 빠지는 삶의 단계를 그렸다. 미국의회도서관 소장품.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템퍼런스 무브먼트(Temperance movement)’라고 불리는 절제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노동자들을 술로부터 단절시켜 근로 윤리를 고취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시도로부터 시작됐다는 사회학적 해석도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에 불어닥친 탐욕 자제 운동
“고기를 먹으면, 사람이 음탕해집니다”

템퍼런스 무브먼트 초기는 알코올 절제 운동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점차 성욕, 육식 등 많은 쾌락들이 교정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알코올 절제, 매춘 근절, 육식 자제까지 나아가는 범 탐욕 자제 운동이었지요.

절제 운동가인 여성전사들이 맥주, 위스키, 진, 럼, 브랜디, 와인 및 주류 통을 파괴하기 위해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1874년 정치 만화 인쇄물.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육류가 왜 탐욕의 근원이냐는 의문이 드실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 사회에서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면서 성욕과 강하게 연관돼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고기에 대한 왕성한 식욕은 정욕의 효모”(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특히 종교계가 ‘템퍼런스 무브먼트’를 주도 했는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에 맞춰 육식을 배제하는 채식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존 하비 켈로그 역시 이 종파의 신자였지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가 세운 배틀크릭 요양소의 대표 관리인으로 근무한 그가 쾌락의 대표적인 양태인 ‘육식’과 ‘자위행위’를 혐오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고기먹으면 사람이 음탕해집니다. ” 영화 로드 투 웰빌에서 존 켈로그 박사를 연기 중인 앤소니 홉킨스.
1902년 화재 이전의 배틀크릭 요양원.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채식 열풍도 함께 불었다
“채식만이 신이 원하시는 식단입니다”

존 하비 켈로그가 ‘식단 개혁’을 외친 미국 최초의 선구자는 아니었습니다. 앞서 ‘신앙인 다운 식사’를 고안한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목사였던 실베스터 그레이엄이 주인공입니다. 굵게 빻은 밀로 만든 빵과 오직 채소만을 먹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항상 성경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의 말씀은 깊이 새겼지요. 채식은 죄짓지 않은 에덴동산의 인간들이 먹는 음식으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드신 것 역시 생선이었다는 점도 그의 채식주의에 힘을 더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금욕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 인물인 실베스터 그레이엄 목사. 켈로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880년 작품, 미국의회도서관 소장품.
그레이엄 목사 역시 자위행위를 비롯해 모든 쾌락에서 자유로운 음식을 꿈꿨습니다. 그 신념을 담아 입자가 두터운(맛 없는) 밀가루를 구워 비스킷을 만들었지요. ‘그레이엄 크래커’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크래커의 최초 형태입니다.
그레이엄 크래커. 크래커의 최초 제품 중 하나다.

마침 1829년부터 콜레라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신의 식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 크래커 역시 전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언제나 아픈 뒤에야 신을 찾는 법이었지요. 영양학자 제임스 케일럽 잭슨은 이에 감화받아 최초의 시리얼인 그래뉼라(Granula)도 개발했습니다.

1880년부터 첫 상용화되기 시작한 그레이엄 크래커. 보기만 해도 욕망이 절제되는 기분이다. 1915년 그레이엄 크래커 제품. <사진 출처=플리커>
자위 혐오자 켈로그
“페스트, 전쟁, 천연두 조차도 자위보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진 못했다.”(아담 클라크 박사)

켈로그는 그레이엄의 신앙을 계승합니다. 종교에 심취한 그는 자위행위를 혐오했습니다. 아담 클라크 박사의 ‘자위혐오론’을 외고 살았지요. 그에게 자위는 어떤 전염병보다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부인과도 각방을 쓸 정도로 ‘성관계’도 싫어했지요.)

대표 저서인 ‘젊은이와 늙은이를 위한 자명한 사실들 (The plain facts for Old and Young)’에는 자위에 대한 비과학적인 주장들이 가득합니다. 한 대목을 살펴볼까요.

“배뇨하는 것을 참아서는 안 된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방광에 염증이 생기고, 그 결과로 비정상적인 흥분을 유도해 나쁜 습관(수음)을 갖게 된다.”
존 켈로그의 대표 작품인 ‘The plain facts for Old and Young’. 자위를 향한 그의 경멸적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자위행위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양상을 12가지나 나열했습니다. 급격한 쇠약, 기억력 감퇴, 비정상적인 탈모, 자극적인 양념을 좋아하는 부자연스러운 식욕의 증가 등. 현대 의학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학설이었지만, 그는 주장을 꺾지 않았지요.

또 수술을 혐오했던 그는 포경 수술만은 옹호했는데요, 이 역시 자위를 예방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위를 자주 하는 남성들에게 포경수술을 추천할 정도였지요. 자위와의 전쟁에서 최전방에 선 전사였던 셈입니다.

“이 음식 먹고 자위하지 말지어다.” 켈로그 박사의 삶을 희화한 영화 ‘로드 투 웰빌’(1994년) 포스터. 주인공 켈로그 박사는 앤소니 홉킨스가 연기했다. <사진 출처=IMDB>
자위를 막을 완벽한 음식...콘플레이크의 탄생
“그래, 이 맛이야. 이거면 사람들의 정욕을 잠재울 수 있겠어.”

1894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켈로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요리하던 밀반죽이 과하게 숙성됩니다. 이게 버리기 아까웠던 존 하비 켈로그는 동생인 윌 켈로그와 함께 이를 뜨거운 롤러에 밀어서 재활용을 시도합니다. 이게 웬걸. 반죽이 플레이크 형태로 떨어져 나오면서 바삭하고 고소한 음식이 된 것이었습니다.

형제는더 많은 실험 끝에 옥수수 반죽을 활용한 ‘콘플레이크’를 개발했지요. (여기서 TMI, 이때는 우유에 말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생우유가 위생적으로 위험한 식품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1906년 출시된 콘플레이크의 초기 광고.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요양원 환자들은 이 메뉴에 매우 만족감을 표시합니다. 지역 사회에서도 입소문이 나면서 콘플레이크에 관한 관심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와 비슷한 목적으로 개발한 켈로그의 역작 ‘땅콩버터’ 역시 인기를 얻기 시작하지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돈은 포스트가 벌었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켈로그는 이후로 ’시리얼의 왕‘으로 큰 부자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련이 그를 찾아옵니다. 요양원의 환자였던 한 남자가 이를 맛보고 먼저 시장에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내의 이름은 C.W. 포스트. 우리가 아는 시리얼 대표 브랜드 설립자였습니다.

“이 집 시리얼 좀 하네. 레시피 좀 알려주쇼.” 1910년 찍은 포스트 사진. <사진 출처=미국 의회도서관>
1891년 C.W 포스트는 배틀크릭 요양원의 고객이었습니다. 켈로그로부터 훌륭한 서비스를 받고 이에 감탄한 나머지 비슷한 요양원을 건립하기까지 합니다. (그것도 배틀크릭 같은 동네에 말이지요!). 이내 시리얼과 같은 건조식품을 만드는 포스트 홀링스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897년, 그레이프 너츠라는 제품을 대량 생산해 큰 성공을 거둡니요. 켈로그 형제의 콘플레이크를 표절한 것이었지만, 대중들은 속 사정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아따, 설탕을 뿌려야 더 맛나당께.” 동생 윌 켈로그 역시 고지식한 형 대신에 설탕을 뿌린 콘플레이크를 출시해 큰돈을 벌었다. 1932년 찍은 사진. <사진 출처=로스엔젤레스 타임즈>
포스트의 성공을 본 동생 윌 켈로그가 형 존 켈로그를 다그칩니다. “원조인 우리도 사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이지요. 또 소비자에 입맛에 맛게 설탕을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형 존은 ’종교인‘에 가까운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욕과 식욕을 자제하고 소화를 편안하게 돕기 위한 음식으로 개발했는데, 여기에 설탕을 뿌리다니요.

결국 존 하비 켈로그는 동생의 제안을 끝까지 거절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동생 윌 켈로그는 홀로 배틀크릭 토스트 콘플레이크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1906월 9월의 일이었지요. 형 존은 동생 윌의 회사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1920년 결국 법원이 윌의 손을 들어줍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애먼 사람이 벌었던 셈입니다.

배틀크릭 요양소 메인 식당 사진엽서. 이곳에서 자위방지용 음식이 서빙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저작권자=프랭크 포터>
아침 식탁을 지배한 ‘금욕주의자’들의 발명품
굴지의 회사 켈로그와 포스트는 전 세계인의 아침 식사를 바꿔버리지요. 우리의 맛있는 아침 식탁이 ’금욕주의자‘들의 열정으로 차려진 셈입니다.

주말 아침, 여러분의 식탁은 어떤가요. 노릇노릇 구운 식빵에 땅콩버터를 바르고, 시리얼을 우유와 함께 즐기고 계신건 아니신지. 어쩌면 식사 후에 당신은 좀 더 경건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발명자의 본 본뜻 과는 달리 “호랑이 기운”을 내어 보시길. 주말만큼은 배우자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요.

어째서인지 호랑이가 토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농심 켈로그>
존 하비 켈로그의 1915년 초상화. 목적은 좀 그렇지만, 맛있는 거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네줄요약>

ㅇ세계인이 사랑하는 아침 식사 콘플레이크는 ‘금욕주의자’ 존 하비 켈로그가 만들었다.

ㅇ그는 곡물로 된 이 음식이 ‘자위’를 방지하고 속을 편안히 해줄 거라고 믿었다.

ㅇ당시 미국에서는 금욕주의적 음식 열풍이 불었다. 그레이엄 크래커 역시 이 중 하나였다.

ㅇ존 하비 켈로그의 ‘콘플레이크’로 돈을 번 건 그의 환자 포스트와 동생 윌 켈로그였다.

<참고 문헌>

ㅇ리처드 작스, 발가 벗기는 역사, 고려문화사, 1994년

ㅇ이병주, 에로스문화탐사, 생각의나무, 2002년

ㅇ존 하비 켈로그, Plain Facts for Old and Young,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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