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순종이 애용하는 고무신’ 대륙고무 사장 이하영의 기막힌 인생유전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3.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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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알렌 선교사에게 영어배워 주미서리공사, 주일공사,외부, 법부대신…손자는 ‘참군인’ 이종찬
찹쌀떡 장수 출신 이하영은 뛰어난 외국어능력과 타고난 처세술로 대한제국 외부, 법부대신까지 지냈다. 1919년 대륙고무 사장으로 변신, 기업인으로 삶을 이어갔다.

1925년 6월 신문에 특이한 기사가 났다. 경성 용산의 대륙고무주식회사가 평양의 고무신공장이 상표권을 위반했다며 고소했다는 내용이었다.

‘대륙고무회사는 대정(大正)11년8월15일에 창립한 이래 그 공장에서 제조하는 작품이 일반 사회로부터 상당한 신용을 얻게 되어 날마다 발전의 상태로 나아가는 중, 작년 7월경 이후로 돌연히 서선(西鮮)지방에는 판매액이 불시에 감소되어감으로 그 원인을 각방으로 조사한 결과, 전기(前記) 이승두씨외 2인이 경영하는 서선(西鮮)고무공장에서 작년 6월경부터 대륙고무회사에서 쓰는 상표와 비슷하게 상표를 만들어서 그 공장 제작품에 그것을 씌워서 대륙회사의 상품보다 비교적 염가로 팔아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대륙회사의 물품으로서 염가로 파는 것처럼 만들어놓았슴이 판명되었음으로….’(‘대륙고무회사장이 상표로 고소제기’, 조선일보 1925년6월5일)

평양 고무신 공장이 대륙고무와 닮은 상표를 고무신에 붙여 싸게 파는 바람에 매출이 뚝 떨어져 검찰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서선고무공장은 대륙고무와 비슷한 ‘대승’(大升)이라는 상표를 썼는데, 디자인이 ‘대륙’과 닮은 꼴이었다. 대륙고무는 대(大)자를 원형으로 하고, 그 속에 육(陸)자를 넣고 좌우에는 경성(京城)을 넣었는데, 서선고무는 대(大)자를 원형으로하고 그 속에 승(升)자를 넣고, 좌우엔 용산(龍山)을 갈라넣고, 그 위에는 대승고무라고 썼다. 대륙고무측은 평양에서 생산했는데, ‘상표에 용산이라고 쓴 것은 변명치 못할 사실이 아닙니까’라고 항의했다.

대한제국 외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은 일제시대엔 성공적인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대륙고무는 '조선 고무신의 원조'를 내세울 만큼, 고무신업계의 대표주자였다. 1930년대의 대륙고무 포스터. 경성내 대륙고무신 판매점 위치를 소개하는 약도까지 담았다. /서울역사박물관

◇1920년대 핫템, 고무신

당시로선 드문 상표권 소송을 제기한 대륙고무 사장은 이하영(李夏榮·1858~1929)이었다. 구한말 주미대리공사, 주일공사와 외부대신, 법부대신을 지낸 고위관료 출신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삼킬 때 기여한 공로로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고 죽을 때까지 중추원 고문으로 활약한 친일파이기도 했다. 이하영은 처세의 귀재였다. 옛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발빠르게 변신했다. 3.1운동으로 만세 시위가 한창이던 1919년, 이하영은 용산에 고무신을 취급하는 대륙고무를 차렸다.

당시 조선에는 일본산(産) 고무신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극소수 상류층이 신는 가죽신 이외에 대다수 사람들은 짚신을 신을 때였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잘 닳는데다 비가 오면 물을 빨아들여 축축해졌다. 물이 스며들지 않는 고무신은 당시로선 최신 핫템이었다. 짚신(25전)에 비해 가격도 40전 안팎으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게다가 짚신에 비해 내구성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1920년을 전후해 전국에 고무신공장이 생겨났는데 대륙고무는 ‘고무신의 원조’이자 대표주자였다.

조선일보 1921년 12월1일자에 실린 대륙고무 광고. 순종이 애용한다고 선전했다.

◇'순종이 애용하는 고무신’ 왕족 마케팅

이하영은 구한말 고위 관료를 지내면서 만든 네트워크를 철저히 활용했다. 1922년 자본금 50만원 규모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박영효, 이윤용을 주주로 끌어들였다. 마케팅 기술도 뛰어났다. 대한제국과의 연줄을 이용해, ‘왕족 마케팅’을 펼쳤다. ‘순종 임금이 즐겨 신는 고무신’이라는 광고를 앞세워 소비자를 공략했다. 1922년 9월 신문에 실린 광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본인이 경영한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 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대륙고무는 날로 번창했다. 이하영은 대륙고무 사장으로 재임하던 1929년 세상을 떴다. 윤치호는 이하영의 부고를 듣고 일기(1929년2월28일자)에 이렇게 썼다. ‘이하영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부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 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1884년 9월 알렌과의 우연한 만남은 이하영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이하영은 알렌의 요리사로 출발해 영어를 배우면서 1886년 외아문 주사로 들어갔다. 2년만인 1888년 주미서리공사가 됐고, 이어 주일공사, 외부대신, 법부대신자링 올랐다.

◇알렌 선교사와의 운명적 만남

어린 시절 찹쌀떡 행상을 할 정도로 가난한데다 일자무식이었던 이하영이 불과 십수년만에 주미대리공사, 주일공사를 거쳐 대한제국 외무장관(외부대신), 법무장관(법부대신), 대륙고무 사장까지 벼락출세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이 개항장이 되자 열여덟살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 점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8년간 일본어와 밑바닥 상술을 익힌 뒤, 1884년 독립해서 무역업을 한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동업자에게 사기당해 장사밑천을 모두 날렸다. 그해 9월 낙담한 채 부산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푸른 눈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만났다. 알렌 역시 1년여 중국 선교 사업에 실패하고 조선으로 사역지를 바꾼 참이었다. 알렌의 처지 역시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의사신분이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지인 하나 없었던 알렌은 붙임성 좋은 이하영을 요리사 명목으로 채용했다. 두 사람은 서로 영어와 조선어를 가르쳐주면서 기회를 노렸다. 석달 째 되던 1884년 12월4일 밤 둘에게는 천운(天運)이라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으로 온 몸에 칼을 맞아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해 살려낸 것이다. 민영익은 왕비 민씨의 조카이자 고종의 측근이었다.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느라 왕실과 관리들을 상대할 때 통역을 한 사람이 이하영이었다. 석달 배운 영어 실력이 변변할 리 없지만, 이하영은 당시 이 땅에서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조선인에 속했다. 알렌은 일약 고종의 어의(御醫)가 됐고, 이하영은 알렌의 통역으로 궁중에 드나들었다. 고종의 눈에 든 이하영은 외아문 주사로 관직에 나섰다.

◇외교부 말단에서 2년만에 ‘주미 대사’

이하영은 1887년12월 주미 전권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과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2등서기관 신분이었다. 박정양은 1888년 1월17일 청나라의 훼방을 뚫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국서봉정식을 마쳤다. 독자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길길이 날뛰는 원세개를 달래기 위해 고종은 그해 11월 박정양을 소환했다. 박정양은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과 함께 귀국했다. 워싱턴에는 이하영만 남았다. 고종은 이하영을 주미서리공사로 임명했다. 외교부 말단 직원으로 들어간 지 2년여만에 ‘주미대사’가 된 셈이었다.

고종은 박정양 공사 출국전 밀명을 내렸다.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의 관세를 담보로 200만달러 차관을 얻고, 이 돈으로 미군 20만명을 빌려오라는 지시였다. 미국 힘을 빌려 원세개의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꿈이었다. 주미대리공사가 된 이하영은 온 몸을 바쳐 뛰었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고 사교력이 남달랐던 그는 이런 업무에 적격이었다. 마침내 미국 뉴욕은행에서 200만 달러 차관을 얻는 데 성공했다. 정부와 의회를 움직여 지원군을 얻는 일도 거의 성사될 듯했다.

◇'돈을 물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조선에 원병을 바편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이하영이 잡지 ‘신민’(1926년 6월호)에 기고한 회고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국이 당시 군대 20만 명을 조선에 파견할 능력도, 그럴 뜻도 있었을 리 없다. 의회에서 조선 파병안을 표결에 붙인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하영이 고종의 명으로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 흥청망청 쓴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호암 문일평은 1934년 조선일보에 ‘대미관계50년사’를 쓰면서 ‘200만달러 차관’설을 소개했다.

‘박공사 일행이 맨처음 본국을 출발할 때부터 청국의 횡포를 응징하기 위하야 미국에 청병(請兵)하려는 밀모가 있었음으로 부산 원산 및 인천 세 항구를 저당하기로 하고 워싱턴에 도착한 이후에 미국 모은행단과 그윽이 교섭을 계속하야 마침내 미화 200만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이로써 군비를 삼아가지고 다시 미국에 청병을 꾀할 새 백방으로 운동한 결과 드디어 미국인 사이에 심후한 동정을 표하는 이가 생겨나게 되었으나 이것이 의회에 제출됨에 미쳐서는 격렬한 반대론을 만나 필경 좌절이 되고 말았으니 그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한미국교를 맺은 이래 아직 이해관계가 옅을 뿐더러 출병원호하는 것은 미국 국헌의 용허하지 않는 바다.’(’대미관계50년사-주미서리공사시대 80′, 조선일보 1934년10월30일)

◇'국가를 위해 사용했으니 탕감해주겠다’

문일평은 차관 200만달러의 후속 처리과정도 소개했다. 이하영의 회고는 물론,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것이다. ‘은행단은 200만달러에 저당잡은 조선 세 항구의 내용을 알아본 즉 빈약하기가 짝이 없어 애초부터 문제가 되지 아니함으로 소비액 16만5000달러를 공제하고 남아있는 183만5000달러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차라리 득책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은행단은) 이하영을 초청하야 호의로 축배를 들어 권하며 가로되 ‘군(君)이 국가를 위해서 사용한 것인즉 소모액을 아주 탕감할 터이니 그리알라’는 미담까지 았다.’

사정을 들은 고종도 이하영에게 ‘안심잉주’(安心仍住)하라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이하영은 마음편히 귀국할 수있었다.

◇상투 틀고 구두 신고 무도회 누빈 이하영

이하영의 좌충우돌 활약은 영화나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어도 될 것같다. 밤낮으로 연회를 찾아다니며 왕족처럼 돈을 뿌린 이하영은 그 삶 자체를 즐긴 것같다. 그는 곧 워싱턴 사교계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상투짜고 조선버선에 구두 신은 서리공사가 무도장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금발여희의 가장 환영하는 표적이 되었다. 홍등녹주사이에 밤새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껴안고 춤을 추고 나면 모든 우분(憂憤)이 다 사라진다.’

이하영은 1000명이 참석하는 초대형 연회를 주최해 워싱턴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 공사 일행이 항상 각부장관과 원로 및 기타 신상(紳商·기업인)의 초대를 받았지만, 우리 공사관측에서 한번도 그네들의 대관(大官)과 사녀(士女)를 초대한 적은 없었음으로 회사(回謝)의 예로 하루는 대연(大宴)을 배설하고 워싱턴 각 방면에 초대장을 발송하야 집회한 빈객이 거의 천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각부 장관과 원로와 각국 공사와 기타 신상은 물론이요,대통령 부인 및 그 영식까지 내참하였다. 대통령 부인의 내참은 워싱턴 건도(建都) 이후 처음 보는 성사라고 그 때 미국 신문에서는 극구 찬송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이 연회가 얼마나 인기의 초점이 되었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대미관계50년사-주미서리공사시대 81′, 조선일보 1934년 10월31일)

◇미국 부호 딸과의 염문도

문일평은 미국 부호 딸과의 염문설도 소개했다. ‘염복이 있는 서리공사는 미국 어느 유명한 부호 따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그 새악씨로부터 약혼의 간청이 있었으며 서리공사도 그때까지 미취의 신세이니만치 마음이 없는 바 아니나 외국인과의 결혼은 당시 국법의 엄금이므로 거절하였더니 하루는 새악씨 모친이 서리공사에게 청하기를 자기 맏사위가 이탈리아 현 육군상인즉 그를 시켜 동국(同國·이탈리아) 황제께 이 사의(辭意)를 주상하야 특히 귀국 왕의 칙허를 얻도록 할선할 터이니 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하고 조르는 바람에 변설에 능한 서리공사로도 한참동안 대답에 군색하였다 한다.’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할 뻔한 미국 부호 딸과의 결혼은 실현되지 않았다.

◇'을사오적’엔 요행히 이름 빠져

1889년 귀국한 이하영은 한성부 관찰사(서울시장)와 주일 공사를 거쳐 1904년 마침내 외부대신이 됐다. 을사조약 체결당시인 1905년 11월엔 법부대신이었는데, 처음엔 조약 체결에 반대하다 한발 늦게 찬성으로 도는 바람에 ‘을사오적’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외부대신 재직 당시 이미 일본에 이권을 넘기는 데 앞장선 주역이었다. 일본이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이하영에게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을 맡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업인으로 변신한 이하영은 1929년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규원이 작위와 대륙고무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회사는 일제 말까지 번창했다.

◇'참군인’ 이종찬이 ‘친일파’ 이하영 손자

이야기는 하나 더 남아있다. 이하영의 손자는 ‘참군인’으로 존경받는 이종찬(1916~1983) 전 육군참모총장이다. 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일제 말기 일본군 소좌로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다 해방을 맞았다. ‘친일파’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1949년 반민특위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종찬이 스스로 습작을 거부한 사실을 밝히자 반민특위는 그를 풀어줬다. 이종찬은 곧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고, 6.25 직전 수도경비사령관, 1951년 6월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종찬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병력동원 지시에 맞서다 해임됐다. 군(軍)의 정치적 독립을 이유로 내세웠다. 유학 형식으로 미국으로 쫓겨난 이종찬은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 5.16 직후 이탈리아 대사로 오래 나가있었고, 유정회 국회의원도 지냈다. 만년의 활동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지만 이종찬은 지금도 군(軍)에선 존경 받는 선배다. 찹쌀떡 장수에서 일국의 대신까지 오른 ‘친일파’ 이하영과 그의 손자인 ‘참군인’ 이종찬의 삶은 복잡다단한 현대사의 굴곡을 떠올리게 한다.

◇참고자료

이하영, 한미국교와 海牙사건, 신민 제14호, 1926,6

박승돈, 한국고무공업 50년 小史, 고무기술협회지 제4권제1호, 1969

한철호, 주일 한국공사 이하영의 임면 배경 및 경위(1896~1900), 경주사학 22, 2003

김명환, 모던 씨크 명랑, 문학동네, 2016

전봉관, 럭키경성, 살림, 2007

김태수,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황소자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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