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현실 넘어 별세계 창조한 예술가
대구가 낳은 ‘조선 천재’ 이인성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1912~2002) 선수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 거리를 달렸지만, 손기정의 쾌거는 식민지 설움에 찬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손기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손기정에 비견되는 유명인사로 대활약한 천재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인성(1912~1950).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조선인을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세 사람의 조선인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 그림의 이인성!” 흠,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손기정과 최승희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만, 어째서 이인성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을까?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
이인성은 1912년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모친이 음식점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했다. 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더 이상 집안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저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미술적 재능을 이인성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 점수만큼은 만점을 받았고, 주위의 인정에 고무되어 혼자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날도 이인성은 대구의 한 교회를 배경으로 야외 사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화가 서동진의 눈에 띄었다. 서동진(1900~1970)은 대구에 서양화 재료를 처음 도입했던 미술가이자 독립운동가 이상정(1896~1947)의 계성학교 제자였다. 스승의 영향 아래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가 제대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귀국 후 1927년 대구에서 최초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륜고의 전신 교남학교에서 14년간 무보수로 일하며 수많은 인재를 길렀다. 서동진은 이인성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갈 곳이 없는 그를 자신이 운영하던 인쇄소 겸 예술가 아지트 ‘대구미술사’에 취직시켰다. 이인성은 이곳에서 일하고 숙식하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몽둥이를 들고 와서 혼내던 이인성의 친부를 대신해서, 서동진은 실질적인 부친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진정한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이인성이 17세 나이인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서동진과 함께 처음 입선했을 때, 서동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보다 제자 이인성의 입선이 더 주목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불과 2년 후인 1931년, 이인성은 스승을 앞질러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해 버렸다. 그해 함께 특선을 차지한 화가가 나혜석 같은 대선배였으니, 실로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서동진은 자신을 앞서가는 제자에 시기심을 느끼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뛰어넘은 제자가 이제 자신을 떠나 더 훌륭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대구 유지들의 힘을 모으게 했고, 대구 거류 일본인들의 협력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경북고녀(慶北高女) 시라가 주키치 교장의 주선으로 이인성은 일본 도쿄에 있는 킹크레용 회사(오오사마 상회)에서, 마치 ‘대구미술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선전 특선을 받자마자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선의 천재 소년”
도쿄로 가서 이인성은 훨훨 날았다. 킹크레용 회사는 크레용과 물감을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에 이인성은 회사가 제공한 화구를 맘껏 사용하면서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이인성은 틈틈이 회사 작업실에서 쉼 없이 그렸다. 그는 유학했다기보다 이때 이미 조선과 일본의 화단을 상대로 어엿한 화가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미술계에 공인된 최고의 전람회인 선전에, 이인성은 일본에서 제작한 그림을 매년 보내 거듭 특선과 최고상을 차지했다. 한때 “선전이 이인성을 위해 있는 거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 시기 이인성의 대표작 ‘가을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등이 쏟아졌다. 낭만과 허무가 공존하는 조선의 ‘향토’를 갖가지 상징과 은유를 더해 연출한 걸작들이었다. 1930년대 조선에 이런 대담한 유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인성은 도쿄에 간 이듬해 일본 최고의 관전(官展)인 제전(제국미술전람회)에 바로 입선했다.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의 천재 소년”으로 대서특필되었고,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일본 유명 화가들이 킹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축하엽서를 보내왔다. 무엇보다 이인성의 수채화 실력은 대구에서부터 갈고 닦은 만큼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1935년 일본수채화회전이 열렸을 때, 이인성은 일본인 화가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최고상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인도 인정한 조선인 화가의 ‘클라스’였다.
◇별세계를 창조하는 화가
이때 최고상을 받은 작품 ‘아리랑고개’가 지금도 남아있다. 유학 중 잠시 조선에 왔을 때 구상한 작품으로, 서울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를 담은 풍경화였다. 이곳은 원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실제 촬영 무대가 되면서 ‘아리랑고개’로 불렸다. 미치광이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이 악덕 지주의 머슴이자 왜경 앞잡이 기호(주인규 분)를 죽인 죄목으로,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등장하는 배경 장소였다. 이인성은 이 영화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 시절 조선인을 대변하는 ‘울분’의 정서가 이인성에게도 참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성은 영화 ‘아리랑’을 오마주하듯 ‘아리랑고개’를 그려서는, 작품의 내막을 잘 알지도 못할 일본인들의 전시회에 당당히 내걸어서 최고상까지 받아낸 것이다.
이인성의 풍경화를 실제 장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실제 모습과 너무 흡사해서 놀라고, 그다음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어낸 뛰어난 ‘연출력’에 놀란다. 그는 그저 밋밋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온갖 화사한 색채와 자유자재의 선을 동원하여, 너무나도 매력적인 ‘별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계가 작품 속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화가야말로 진정 위대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이인성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그의 캐릭터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첫 부인이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이인성이 혼자 첫딸 애향(愛鄕)의 이화중학교 입학을 챙길 때였다. 엄마 없는 딸을 위해 이인성이 직접 교복을 맞추었는데, 나중에 딸이 찾으러 가보니, 원래 교복인 검은 주름치마 대신 분홍과 보라로 이중배색한 치마를 만들어 놓았더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져 묻자, 이인성은 “예쁜 색도 많은데 여학생에게 검정 옷을 입히냐”며 학교가 문제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이인성은 세상의 규율과 통제에 본능적인 저항감을 지닌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가 평소에는 말할 수 없이 얌전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가 심했다는 것도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주사는 난데없이 일본 경찰에게 달려들어 시비를 거는 일이었다. 그는 불합리한 통제를 견디지 못했고, 현실을 넘어선 자신만의 별세계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던 천생(天生) 예술가였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실제와 별세계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던 그에게 일이 터졌다. 1950년 11월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라 제대로 된 경찰이나 군인도 아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치안대원들이 도시를 휘저을 때였다. 서울 북아현동에 올라와 살던 이인성은 이날도 술을 마시다가 치안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그만 술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며 자꾸 간섭해대는 대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이인성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가 하도 당당하니까, 어쩌면 높은 사람인가보다 하고 대원들이 이인성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에게 이인성이란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자이기는커녕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치민 치안대원들이 ‘환쟁이 주제에’ 하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이인성의 머리에 적중하고 말았다. “오발이다!” 외마디를 남기고 대원들은 사라졌다. 무방비 상태의 이인성은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후에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천재 예술가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왜 그들은 (천재 예술가를)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가” 하고.
◇이인성은 억울하다
이인성을 죽인 것이 전쟁통의 그 치안대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인성의 이름 석 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화가에 대한 존중이 그 시대보다 지금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는 세상 어디에도 있게 마련이지만, 뛰어난 예술가 한 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일은 세상 더 어렵고 귀한 일인데….
이인성의 사후(死後) 그에 대한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도 지나치게 야박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선전’이나 일본의 ‘제전’에서 주로 활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인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사회 시스템이 그것뿐이었는데. 그것밖에 없는 식민지 시대를 탓해야지 왜 개인에게 그 구조를 뛰어넘어 생존할 것을 기대하는가. 그마저 생존해내지 못하고 덧없이 죽은 화가에게 말이다. 일장기를 달고 뛴 손기정이나 ‘사이 쇼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누빈 최승희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왜 유독 이인성에게만 ‘관전 화가’라는 딱지를 붙여 평가절하하는지. 억울하다. 이인성의 울분이 전이된 듯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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