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효자 아니었어? 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2023. 3. 4. 00: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던한 이방인
.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편〉 연재글은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제임스 휘슬러,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일부 확대)
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어머니, 나의 어머니.

젊은 시절 어머니는 저를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고 믿었어요. 침울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요. 어머니는 저를 성숙하게 키우지 못했어요. 비관적으로 만들었어요. 반항아로 돼버렸어요. 어머니는 저를 말뚝에 묶으려고 했어요. 날뛰면 알아서 줄이 감기도록 했어요. 어머니. 당신은 저를 부드럽게 다룰 수 있었어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었어요. 보다 자유롭게 키웠다면, 저는 줄을 물어뜯고 도망치는 일 따위 하지 않았어요. 저도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을 거예요.

"아들아. 앉아도 되겠니? 관절염이 나를 짓누르구나."

"그러세요." 1871년 영국 런던. 현실로 돌아온 제임스 휘슬러는 어머니 애나 마틸다 맥닐의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몸이 예전같지 않아." 어머니는 검은색 의자를 질질 끌고 왔다. 힘들어보였다. "그러니까 왜 고집을 부려 생고생을 해요." 어머니는 휘슬러의 말에 응수하려다가 잔기침을 했다. 가래가 끓었다. 어머니는 더는 억센 여성이 아니었다. 이제 일흔 살을 바라보는 작은 노인이었다. 휘슬러는 어머니의 비틀거림을 못본 척했다.

휘슬러는 지금 어머니를 캔버스에 담고 있다.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는 섭외해둔 다른 여성을 그리려고 했다. 준비도 마쳤다. 붓도 말렸고, 물감도 색깔별로 짰다. 불편한 작업복도 억지로 입었다. 어머니가 외출하지 않고 있는 게 변수였지만, 없는 사람으로 두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그 모델은 약속을 깨버렸다. 김이 팍 샜다. "아들아."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날 그려도 괜찮다." 담담하게 제안했다. "아깝잖니. 저 물감만 해도 몇 끼 식사값은 되겠는데." 휘슬러는 더는 못들은 척할 수 없었다.

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

어머니.

젊은 시절 어머니는 제가 안정적으로 살길 바랐어요. 제 역량으론 택도 없는 목사, 제 실력으론 넘볼 수 없는 군인이 되길 바라며 몰아세웠어요. 알아요. 어머니도 희생했어요. 저에게 당신 삶을 바쳤어요.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는 생 전체를 걸었어요. 어머니. 저는 그게 싫었어요. 무조건적 희생, 두려울 만큼의 집착, 밑도 끝도 없는 통제에 숨이 막혔어요. 어머니는 저를 그냥 물에 던져야 했어요. 물결이 알아서 저를 둥둥 뜨게 해주기를 기다려야 했어요.

"얼마나 그렸니."

어머니를 이렇게 오랜 시간 본 적이 있었는가. 이토록 주름 하나까지 관찰한 적이 있었는가. 휘슬러는 그림을 그리며 온갖 생각을 다했다. 평소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꼬리를 물었다. 그럼에도 휘슬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머니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거의 다 그렸어요." 휘슬러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일부 확대)
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일부 확대)

휘슬러는 어머니를 차가운 여성으로 그렸다.

이를 악 물고 늙고 여윈 노인으로 표현했다. 어머니는 흰 두건을 쓴 채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빼빼 마른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고목 같은 손은 허벅지 위에서 그대로 굳었다. 방도 황량하게 그렸다. 액자 하나만 간신히 더 그렸다. 휘슬러는 이따끔 밀려오는 연민을 무시했다. 슬쩍 찾아오는 동정도 몰아냈다. 단 하나의 선도 자애롭게 긋지 않았다. 단 하나의 색도 인자하게 채우지 않았다. "정말, 나와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니." "어머니, 제발요…. 제발 그 말은 그만하세요." "그래, 알았다." 그래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게다…. 휘슬러는 어머니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듯했다.

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일부 확대)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1).'

휘슬러는 그림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다른 이가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나의 어머니', '앉아있는 어머니', '어머니의 옆모습' 따위 제목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휘슬러는 그렇게 끝까지 어머니와 거리를 뒀다. 훗날 이 작품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화가의 어머니' 등 제목을 달고 널리 알려진다. 그가 알았다면 성질을 냈을 터였다. 휘슬러도 어머니가 가엽기는 했다. 그 억센 어머니가 휘청대고 있다. 이젠 고작 모델의 대타 노릇이나 하고 있다. 휘슬러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끝끝내.

어머니, 사랑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제임스 휘슬러, Chelsea Shopfronts

휘슬러는 1834년 미국 메사추세츠주(州) 로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휘슬러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실력 좋은 토목기사였다. 아버지는 해외 출장도 자주 갔다. 1842년,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로 갔다. 일거리는 넘쳤다. 능력도 인정 받았다. 아예 둥지를 틀었다. 휘슬러는 러시아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휘슬러가 미술을 제대로 접하게 된 계기는 특이했다. 휘슬러는 예민함을 타고났다. 변덕도 심했고, 신경질도 자주 부렸다. 부모는 꼬마 폭군을 대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느 날이었다. 휘슬러에게 별 뜻 없이 붓과 색연필을 줬다. 금방 싫증낼 줄 알았는데 무섭도록 집중했다. 낙서든, 스케치든 일단 그리기만 하면 그것만 붙들었다. 부모는 그런 휘슬러에게 미술을 권할 수밖에 없었다.

휘슬러는 그림에 재능도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그림 좀 그린다는 선생들은 이 꼬마의 습작만 보면 "내 어릴 적 그림과 비슷한데!"라며 칭찬했다. 1844년, 저명한 화가 윌리엄 앨런도 휘슬러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시 상황을 일기로 썼다. "위대한 예술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의 어린 아들은 비범한 천재성을 갖고 있소. 다만, 그의 성향을 넘어설 만큼의 자극은 주지 마세요.'라고." 1847~1848년,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일하는 동안 나머지 가족은 영국 런던에서 잠깐 살았다. 휘슬러는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용돈을 갖고 그림 강의도 듣고, 수집가를 만나 요즘 사조도 귀동냥했다. 이쯤 휘슬러는 화가 꿈을 굳혔다. "아버지. 제 선택에 반대하지 않기를 바랄게요." 휘슬러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였다. 그가 15살 때였다.

제임스 휘슬러, Coast Scene, Bathers

휘슬러는 그렇게 철없는 유망주로 컸다.

반항적이어서 외려 더 매력적인 신인으로 자리 잡는 듯했다. 하지만 삶이 쉬울 리 없었다. 1849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숨졌다. 사인은 콜레라였다. 온 가족이 충격을 받았다. 폭풍우에 선장만 휩쓸리고 선원들만 살아남은 격이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배를 돌려 온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남은 가족들과 함께 고향 미국으로 왔다. 이쯤부터 어머니와 휘슬러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장남 휘슬러에게 매달렸다. 알게 모르게 가장의 역할을 압박했다.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 침울하고 섬세한 얼굴이 죽은 남편을 쏙 빼닮아 더 그랬다.

휘슬러는 그런 어머니가 못마땅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휘슬러는 어머니 뜻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성경과 스케치북을 함께 들고 다녔다. 캐리커처 그리기가 낙이었다. 그의 성향에 도저히 맞는 길이 아니었다. 결국 못 버텼다. 휘슬러가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육군사관학교였다. 이 또한 어머니의 뜻이었다. 휘슬러는 어김없는 문제아였다. 매번 지각했다. 툭하면 결석했다. 그는 당구장에서 시간을 죽였다. 휴게소에서 널브러져 잤다. 애초에 나쁜 시력, 비실대는 몸을 갖고서 무리하게 온 곳이었다. 휘슬러는 지도 그리기 수업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림 그리기 비슷한 걸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지도 구석에 뱀, 인어, 고래 따위를 그리다가 벌점을 받곤 했다. 휘슬러는 3년을 버텼다. 결국 화학 과목에서 낙제해 퇴교 당했다. 모두 다 시간낭비였다. "만일 실리콘이 기체였다면 나는 후에 장군이 됐을지도 모르지." 훗날 휘슬러는 그 시절을 놓고 이렇게 비아냥댔다. 생도 시절에는 실리콘을 기체로 알았던 듯하다.

쿠르베·마네·드가 만나 눈을 뜨다
제임스 휘슬러, Sunday at Domburg

"엄마의 부탁이야. 제발 더 실용적인 직업을 가지면 안 되겠니. 화가가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어머니, 저도 할만큼 했어요. 이제 좀 저를 내버려두세요. 더는 악몽으로 밀어내지 마세요…. 휘슬러는 속으로 이 말을 삼켰다. 1855년, 휘슬러는 조용히 짐을 쌌다. 만류를 침묵으로 뿌리쳤다. 휘슬러는 프랑스 파리 땅을 밟았다. 미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그는 이날부터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가지 않는다. 휘슬러는 파리에서 보헤미안의 삶을 만끽했다. 제멋대로 살았다. 철은 없고 허세만 많았다. 휘슬러도 거장의 문하생이 되길 꿈꾸기는 했다. 그저 바람이었다. 그를 받아줄 강심장은 없었다. 낙담한 휘슬러는 술을 퍼마셨다. 어머니가 보내준 돈은 술과 담뱃값으로 탕진했다. 빚이 쌓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을 베껴 팔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망나니처럼 마냥 시간을 허비하지만은 않았다.

휘슬러는 술자리를 돌며 예술가 친구들과 마주했다. 너그러운 성격의 앙리 팡탱 라투르와 친해졌다. 행운이었다. 그를 통해 사실주의 대부 구스타브 쿠르베, 인상주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절친 에드가 드가 등과 사귈 수 있었다. 모두 한 '싸가지'하는 이들이었다(그래서 더 잘 통했는지도 모른다). '미국 촌놈'은 파리 물을 먹는 진짜 문제아들과 예술세계를 교류했다. 이제 미술은 신화와 종교가 아닌 삶의 현장을 담아야 함을 깨달았다. 휘슬러는 파리에서 시와 음악도 공부했다. 특히 음악에 진심이었다. 음악인들 모임에 빼놓지 않고 참석할 정도였다. 휘슬러는 그림과 음악이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그렇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앞으로의 거의 모든 그림에 음악과 악기 관련 제목을 단다.

제임스 휘슬러, 피아노에서

휘슬러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 '피아노에서(At the piano)'다.

그는 캔버스에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 이를 지켜보는 조카 모습을 그렸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 음악을 향한 애정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어머니는 음울해보인다.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흰색으로 꾸민 조카는 강인해보인다. 존재감이 가득하다. 휘슬러는 피아노를 어머니보다 더 정성껏 그렸다. 문양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휘슬러는 촌놈이었지만 눈치보지 않았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대로 그려야 직성이 풀렸다.

제임스 휘슬러,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

휘슬러는 1860년쯤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휘슬러가 존재감을 보이는 데는 아일랜드 출신의 한 미녀 모델의 역할이 컸다. 그녀 이름은 조안나 히퍼넌이었다. 휘슬러는 1860년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히퍼넌을 만났다. 그녀는 17살이었다. 휘슬러는 히퍼넌에게 첫 눈에 반했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 큼직한 눈, 길고 가늘게 뻗은 손가락에 심취했다. 히퍼넌은 영감을 안길 만큼 지적 수준이 높았다. 그림도 직접 그리는 등 손재주도 좋았다. 휘슬러는 구애를 이어갔다. 이 덕에 둘은 파리에서 함께 겨울을 보냈다. 휘슬러는 너무 좋아 붓을 들었다. 그림 속 히퍼넌은 꼿꼿하게 서있다. 드레스는 눈처럼 새하얗다. 왼손에는 백합을 들고 있다. 천사, 아니면 성녀 같다. 그런 히퍼넌은 두 발로 곰 가죽 깔개를 밟고 있다. 곰의 표정은 생뚱맞을 만큼 위협적이다. 해사한 히퍼넌의 '반전 매력'을 표현했다는 설, '이 여자는 내 여자니 건들지 말라'는 경고를 담았다는 설 등이 있다. 해석이야 어떻든, 눈이 시릴만큼 순결한 작품이다. 제목은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였다.

제임스 휘슬러, Symphony in White, No. 3
제임스 휘슬러, Symphony in White, No. 2 The Little White Girl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휘슬러는 히퍼넌만큼 이 그림도 좋았다.

그는 곧장 파리 살롱전에 이 작품을 출품했다. 탈락했다. 그놈의 아카데미틱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성질난 휘슬러는 이후 낙선전(살롱 심사에서 떨어진 작품을 모은 전시)에 그림을 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기성 예술계가 발로 찬 이 그림에 요즘 대중들은 열광했다. 이 그림에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흡입력이 있었다. 전시가 무르익을수록 휘슬러의 팬이 많아졌다. 추종자가 따라붙었다. '여성의 영혼이 깃든 그림'이라는 다소 섬뜩한 호평도 나왔다. 휘슬러의 이 작품만은 마네가 같은 공간에서 터뜨린 핵폭탄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 묻히지 않았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구스타브 쿠르베, 여인과 영무새(히퍼넌을 모델로 그림)

다만 이와 별개로 휘슬러와 히퍼넌의 끝은 좋지 못했다.

쿠르베도 히퍼넌은 종종 모델로 활용했다. 쿠르베가 그린 히퍼넌 모습이 너무 야했다는 게 문제였다. 휘슬러는 쿠르베와 싸웠다. 어떻게 이런 여자를 그렇게 에로틱하게 그릴 수 있느냐고 따졌다. 히퍼넌과도 다퉜다. 어떻게 그런 부탁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느냐고 윽박질렀다. 휘슬러는 상심했다. 이들 모두에게 벽을 쳤다. 더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화가의 어머니’?…그런 것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임스 휘슬러,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2 Portrait of Thomas Carlyle

1864년, 어머니가 휘슬러의 런던 집에 찾아왔다.

영국과 프랑스를 바쁘게 오가던 휘슬러가 런던에서 숨을 돌릴 때였다. 어머니는 1875년까지 휘슬러와 거의 함께 했다. 휘슬러는 어머니를 무뚝뚝하게 대했다. 휘슬러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진심이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후 자식을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고마웠다. 여전히 올바르고, 끝없이 성실한 점은 존경스러웠다. 그럼에도 휘슬러는 어머니가 미웠다. 답답했다. 자신에게 보인 도 넘는 간섭, 무거운 집착만 생각하면 동정심이 쏙 들어갔다.

어머니가 권한 과거 일은 끔찍한 결과만 낳았다.

신학교에서는 열등감, 육군사관학교에선 무력함만 배웠다. 다 악몽이었다. 차라리 예술계에 더 빨리 뛰어들었다면 삶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내 아들 잘 되라고 한 일'이라고 믿었다. 어머니의 세계는 깨지지 않았다. 휘슬러는 어머니를 포기했다. 대화가 점점 줄었다. 휘슬러는 결국 어머니를 잉글랜드 요양원에 보냈다.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찾지 않았다. 휘슬러는 어머니가 죽고서야 자기 이름에 그녀의 성 '맥닐'을 붙인다. 애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뒤늦게 죄책감을 느낀 건지는 모를 일이다.

1934년 미국 어머니의 날 기념 우표.

훗날 휘슬러의 그림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은 그의 가장 위대한 그림이 된다.

미국 모성(母性)의 아이콘이 된다. 1934년, 미국 정부는 어머니의 날 기념으로 이 그림을 우표에 찍는다. "미국의 어머니들을 기억하고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도 붙인다. 휘슬러가 살아서 이 모습을 봤다면 조소를 띄웠을 터였다.

Fight for Her, 캐나다에 붙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포스터.

미래의 평가가 어떻든, 휘슬러는 어머니 그림을 통해 현생을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늙고 여윈 어머니를 담은 이 작품은 화가 뜻과 상관없이 동시대 사람들의 심금도 울렸다. 화단에서 호평이 쏟아졌다. 휘슬러는 비로소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나중에는 프랑스 정부가 이 작품을 직접 샀다. 오르세 미술관에 고이 모셨다. 휘슬러는 어머니에게 쌓인 게 많았다. 눌어붙어 차마 긁어내지 못한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어머니 덕에 잘 풀릴 수 있었다. 하지만 휘슬러는 그러지 못했다. 휘슬러는 곧 자기 성격을 쏙 빼닮은 이를 마주한다. 휘슬러도, 그 사람도 서로의 성질을 못 참고 마구 달려든다. 휘슬러는 예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재판에 휘말린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인생 1막에 이어 2막에서도 이어진다.

인생 2막도 파란만장…존 러스킨과 맞붙다
제임스 휘슬러,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추락하는 불꽃

"휘슬러, 이 그림 주제가 뭡니까."

"밤을 그린 작품입니다. 정확히는 크레모른(Cremorne) 정원에서 펼쳐진 불꽃놀이지요." "밤을 그렸다고? 크레모른 전경이 주제가 아니라?" "주제가 크레모른 전경 그 자체였다면 사람들은 외려 실망했겠지요. 너무 뻔하잖아요. 그리고 여러분이 놓친 게 있는데, 이 그림에는 예술적 배열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런 기법을 야상곡(Nocturne)이라고 명명해왔어요." "아 됐고. 휘슬러, 당신은 이 그림을 '해치우는(knock off)' 데 얼마나 시간을 쏟았지요?" "하루. 아니, 그 이튿날도 손봤으니 이틀?" 존 러스킨 변호인의 빈정대는 말에 휘슬러도 비슷한 투로 받아쳤다. "이틀 일하고서 그런 큰 돈을 불렀다고?" 법정이 술렁였다. 휘슬러는 수많은 방청객의 눈초리를 견뎠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려고 했다.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추락하는 불꽃(일부 확대)

1887년 말, 중년의 휘슬러가 법정에 섰다. 40대가 곧 꺾일 시기였다.

사연은 이랬다. 영국 출신의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이 그해 런던 한 화랑의 전시회를 찾았다. 러스킨은 한 작품 앞에서 멈췄다. 역겨운 걸 본듯 인상을 썼다. 그 앞에는 휘슬러의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추락하는 불꽃(Nocturne in Black and Gold:The Falling Rocket)'이 걸려 있었다. 사실주의와 복고주의 결합을 지향한 라파엘 전파(前派)에 심취했던 러스킨이 볼 때 휘슬러의 이 거무죽죽한 그림은 당혹스러웠다. 구도는커녕 형체도 없다. 유치원생이 물감을 끼얹은 것 같았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쓰레기 같았다. 왜 또 음악을 그림 제목으로 붙였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관심종자가 틀림 없었다. 그런 러스킨을 격분하게 한 건 작품 값이었다. 고작 60.3×46.6cm짜리 그림이 200기니(현재 가치로 약 2400만원)? 러스킨은 참을 수 없었다.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추락하는 불꽃(일부 확대)

러스킨은 곧장 펜을 들었다.

"현대 화단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어느 정도 기행은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발칙할 만큼은 아니라도 쓸데없이 불완전함을 즐기곤 한다"고 썼다. 이 정도로 화가 안 풀렸다. 휘슬러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싶었다. "휘슬러의 그림을 전시한 화상은 의도적 사기꾼(willful imposture)인 그의 작품을 걸지 말았어야 했다"고도 썼다. 분노는 가시질 않았다. "나는 과거에도 코크니(런던의 우범지대)의 촌뜨기를 보고, 듣곤 했다. 하지만 한 어릿광대가 대중 얼굴에 물감을 한 바가지 퍼붓고는 200기니를 요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훗날 러스킨은 휘슬러의 이 그림이 자신에 대한 도전, 회화를 향한 모욕으로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추락하는 불꽃(일부 확대)

그러나 러스킨은 상대를 잘못 고르고 말았다.

하필 휘슬러라니. 러스킨의 신랄한 말은 대중의 공감을 샀다. 이대로 KO승을 거둘 수도 있었다. 순하고 심약한 화가였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휘슬러였다.그 시절 미국 촌놈 주제에 거장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든, 반항아 마네와 친구 먹고 혁명가 쿠르베와 맞짱 뜨던 사내였다. 휘슬러는 격노했다. '사기꾼' 내지 '어릿광대'라는 표현은 참을 수 없었다. 러스킨이 위대한 사상가든, 유명 비평가든 알 바 아니었다. 휘슬러는 러스킨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림을 '해치운다'?

저 변호인 자식은 내가 그림을 장난으로 대하는 줄 아나? 휘슬러는 변호인의 말에 모욕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참았다. 상대는 러스킨의 노련한 전문가, 검찰총장이었다. 그 시대는 변호인으로 현직 검찰총장도 나설 수 있었다. 러스킨의 무기는 또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 번 존스 등 잘나가는 화가를 대리인으로 데려왔다. 말그대로 '초호화 사단'이었다. 휘슬러는 때를 기다렸다. 단번에 승부를 내야 했다. 꼬투리가 잡히면 끝이었다. "휘슬러의 작품은 훌륭하지요. 하지만 뛰어난 걸작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워요." 존스가 속을 살살 긁을 때도 가만히 둔 이유였다.

존 러스킨

"여보세요. 겨우 이틀 작업의 대가인데 200기니를 불렀어요? 돈은 일한 만큼 벌어야죠. 쉽게 그린 그림으로 이렇게 비싼 값을 받는 건 사기꾼이나 하는 짓 아닌가요?"

변호인이 휘슬러를 몰아쳤다. 이게 마지막 일격임이 틀림없었다. "아니요." 휘슬러가 고개를 들었다. 변호인은 흠칫했다. "그 금액을 부른 이유는요. 제가 일생동안 얻은 모든 지식, 평생에 걸쳐 키운 모든 감각을 그 작품에 담았기 때문이에요." 휘슬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러스킨의 변호인은 말문이 막혔다. 한 방 먹었다. "어디에?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이 따위 말을 하는 순간 "네가 신이라도 돼?"라는 식으로 모든 전위(前衛) 예술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

이겼지만 졌다…빈털터리가 되다
제임스 휘슬러, 화가의 자화상

승소, 휘슬러. 패소, 러스킨.

휘슬러가 이겼다. 러스킨이 졌다. 하지만 이번 재판에서 승자는 없었다. 다 패자였다. "러스킨은 휘슬러에게 1파딩을 배상하라." 판사가 말했다. 1파딩은 7펜스(약 112원)였다. 박터지게 싸우고 이겼는데 동전 하나 받은 셈이었다. 법정 비용은 양측이 반반씩 냈다. 휘슬러는 이 돈을 감당하지 못했다. 집과 작품을 다 팔아도 어려웠다. 그는 파산했다. 러스킨도 비슷했다. 러스킨은 현대미술에 시비 거는 구닥다리가 됐다. 직을 하나 둘 내려놨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최고 명예직인 옥스퍼드대학교의 슬레이드 특별교수직도 사임했다. 러스킨은 유럽 화단에서 현대미술 사조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선구자였다. 그런 그는 '나만 옳다'는 오만, 생각보다 말이 앞선 경솔함으로 최악의 수모를 겪었다. 휘슬러와 러스킨 둘 다 자기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역시나 휘슬러는 뒤끝을 보였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러스킨을 계속 씹었다. 1890년에는 그간의 소송 과정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제목은 '적을 만드는 우아한 미술'이었다. 영원히 남는 기록물로 확인 사살을 한 셈이다.

제임스 휘슬러, on orange note
제임스 휘슬러, Note in blue and opal

휘슬러는 런던에서 잠시 떠났다.

모욕과 빚 독촉을 피해야 했다. 휘슬러는 이탈리아 베니스로 갔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예술혼의 불씨를 지키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말년에는 파스텔화를 즐겼다. 파스텔화만 100개 넘게 그릴 정도였다. 이쯤 휘슬러의 기교와 감성은 당대 화가 중 최고였다. 당연히 그림 의뢰도 계속 들어왔다. 작품도 꽤 잘 팔렸다. 휘슬러는 기운을 차렸다. 1898년에 예술학교를 설립했다. 건강 문제로 3년도 안 돼 문을 닫았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쏟았다.

휘슬러는 1903년 7월 런던에서 사망했다.

69번째 생일을 맞이한 뒤 엿새 뒤였다. 사인으로는 납 중독이 꼽힌다. 그가 달고 다닌 흰색 물감에 납이 다량으로 섞여 있었다는 분석이다. 휘슬러는 충돌되는 삶을 살았다.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끝내 용서하지 못한, 참된 사랑을 만났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한. 그 시절 카뮈가 '이방인'을 썼다면 소재로 삼아도 될 거리였다. 그런 와중에도 휘슬러는 끝내주는 모던한 생도 살고 갔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생을 마친 프랑스 화가, 자신을 욕하는 이는 누구든 끝까지 쫓아가 되갚아준 사람. 정착과 겸손이 미덕이던 그 시절, 그는 끝내 꼿꼿했다.

〈참고 자료〉

Memories Of James Mcneill Whistler, The Artist, Way, Thomas Robert, Sagwan Press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

속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문예출판사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3)“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4)‘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5)“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6)‘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7)“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8)“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9)“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0)“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1)“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2)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3)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4)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5)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16)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17)“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18)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