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전산망 먹통, 복구 못했다... ‘손 메모’로 재판

양은경 기자 2023. 3. 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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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이전 작업 중 시스템 중단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대법원전산정보센터./조선일보 DB

법원 전산망 전체가 마비되면서 재판 일부가 연기되고 전자 소송, 사건 검색 등 대국민 서비스가 전면 중단되는 초유 사태가 2일 발생했다. 이는 법원이 사법 업무 전산화를 통해 재판 사무 시스템을 완비한 2002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 법원 전산망 마비는 지난 1일 개원한 수원회생법원과 부산회생법원에 회생·파산 사건 관련 자료를 이전하는 작업 중에 발생했다. 이 작업은 지난달 28일 오후 8시에 시작, 2일 오전 4시에 끝날 예정이었는데 프로그램 오류 등으로 제때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법원이 자료 이전을 위해 중단했던 재판 사무 시스템과 전자 소송 시스템을 다시 가동하려고 했지만 관련 작업이 계속 지연되면서 이날 법원 재판 업무가 시작될 때까지 두 시스템의 정상 운영에 실패한 것이다.

법원 전산망 ‘먹통’ 피해 상황

이에 법원행정처는 2일 오후 1시 이후에는 법원 전산망이 복구될 것이라고 했다가, 다시 이날 중에는 복구가 어렵게 됐다고 밝혔다. 김상환 법원행정처장은 사과문을 내고 “국민 여러분께 큰 불편을 끼쳐 드린 점에 대해 깊은 사과 말씀을 올린다”고 했다.

한편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날 부산회생법원 개원식에 참석해 “지역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서비스를 구축해야 한다”면서 “국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법원 안팎에서는 “전산망 전체가 마비된 날에 대법원장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3월 2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부산회생법원 개원식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현판식을 개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법원 전산망 전체가 마비되자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민사 재판부가 재판을 연기하는 일이 잇따라 생긴 것으로 전해졌다. 민사 소송은 기록을 모두 전산망에 올려둔 상태에서 진행한다. 판사가 법정에서 전산망에 접속해 기록을 보며 재판하게 돼 있다. 전산망이 막히면서 재판을 미루는 사건들이 나온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다음 재판 날짜를 잡으려 해도 전산망이 복구되지 않아 비어 있는 법정을 확인할 수도 없다”고 했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20년 넘게 법원에서 근무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사건 기록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날 전산망 마비에도 재판을 한 판사들은 종이에 메모하거나 개인 컴퓨터에 기록하면서 소송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메모와 기록은 전산망이 복구되면 따로 등록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 부장판사는 “전국 법원이 구석기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세계적 정보 통신(IT) 강국이며 법원 전산화 선진국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소송 제기와 자료 제출을 온라인으로 할 수 있게 돼 있는 전자 소송 시스템도 이날 ‘먹통’이 됐다. 법원 민원실은 종이 서류를 들고 찾아오는 사건 당사자들로 붐볐다. A 변호사는 “다음 주 화요일로 예정된 총회 개최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이날 전자 소송 시스템으로 내려고 했는데 전산망 마비로 못 했다”고 했다. 그는 “서류로 제출하면 상대방에게 우편 송달 하는 데 시간이 걸려 총회를 멈출 수 없게 될 수 있다”면서 “내일 전자 소송 시스템으로 신청하려 하는데 그때까지 전산망이 복구되지 않으면 낭패”라고 했다.

재판 진행 상황을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 검색 시스템 홈페이지도 ‘사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작동이 멈췄다. B 변호사는 “다른 변호사가 진행하던 사건을 넘겨받아 의뢰인과 면담했는데 사건 검색이 안 돼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C 변호사는 “상대방이 답변서를 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사건 검색 시스템은 이날 오후 9시 30분쯤 복구됐다.

등기부등본 등을 열람·발급하는 대법원 인터넷 등기소도 전자 제출용 등기 사항 증명서 발급, 이의 신청 사건 번호 조회 등 일부 서비스가 중단됐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과거 서울회생법원 개원 때 이전해야 했던 자료의 약 3배(7억건)를 이번 수원회생법원, 부산회생법원 개원 때 이전했다”면서 “방대한 데이터와 시스템 오류로 예정 시간 안에 작업을 완료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막을 수 있는 일을 막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 판사는 “회생법원 개원 전에 자료를 미리 옮기거나 예행 연습을 하는 등 준비를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판사는 “3일에도 법원 전산망이 정상 운영되지 못한다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직접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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