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땀 흘린 성과급도 미국에 주란 말이냐”…‘반도체 하인’ 만드는 조건에 분노

2023. 3. 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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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반도체 지원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 [로이터]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피땀 흘려 일한 반도체 근로자들의 성과급(PS)을 미국과 함께 나누자는 말에 해당한다”

“자사주 매입으로 주가 부양 바라는 국내 투자자들은 무슨 잘못이냐”

미국 정부가 반도체 기업에 520억달러(약 68조원)를 지원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을 미국 정부에 반납하고, 반도체 핵심 공정 접근 허용을 요구하는 등 ‘일방적 족쇄’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당혹감과 함께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도 이번 미 정부의 조건을 두고 비판적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미국 내 건설·투자 비용 증가가 불가피해져 국내 기업과 미국 정부의 ‘반도체 동맹’ 신뢰가 저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2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가 자국 반도체 공장 건설 관련 보조금 지원 방안을 발표하자, 이에 대해 국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비판적 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우리는 미국 반도체 회사와 다른 회사들이 바이든 대통령의 산업 정책에 서명하기 위해 지불할 대가를 알게 됐다”며 “그들(반도체 회사들)은 진보적인 산업적 사회 정책에 계약하는 하인(servants)이 될 것”이라고 미 상무부의 반도체 기업에 대한 과도한 요구 사항들을 비판했다. 워싱턴 싱크탱크 미국경제전략연구소의 설립자인 노동경제학자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 역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 정책은) 반도체 업체들에 특별한 선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총 52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금 중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지급하는 390억달러(약 51조7000억원)에 대한 신청 절차와 기준을 발표했다. 반도체과학법(Chips Act) 보조금 신청절차 및 심사 기준이다.

최근 국내 반도체 업계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갈등에 따라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칩 생산이 제한되면서, 중국을 벗어난 생산 거점 다변화를 다각도로 검토 중이다. 특히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미국 반도체 공장 건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공약되면서, 미국 중심의 팹(생산공장) 건설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미국의 조건으로 이 같은 기류가 급속도로 식을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의 미국 테일러 반도체 공장 건설 모습.[SNS 캡처]

업계에서는 미국의 요구 사항이 결국 반도체 경영상 사업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초과수익에 대한 미국과 공유 ▷지원금의 배당·자사주 매입 사용 금지 ▷현금흐름 등 재무 계획서 제출 뿐 아니라 첨단 칩 공정에 대한 접근 역시 요구했는데, 이같은 조건이 모두 유·무형의 경영상 추가 비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진단이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에 공장을 짓는 데 다른 국가보다 비용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럼에도 동맹국인 미국의 대외 정책 방향을 보고 공장을 짓는 것인데, 상무부의 까다로운 조건을 보니 미국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투자 의지가 꺾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글로벌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서 새로운 팹(생산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대만에 지을 때보다 44% 가량 비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국 역시 이와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월 스트리트저널 역시 “칩 제조업체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제조를 아시아로 옮겼다”며 “미국에서 칩을 생산하는 것은 해외보다 40% 더 비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3월에 구체적으로 내용이 공개될 초과이익 공유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국내 반도체 학계 관계자는 “초과수익을 미국과 공유하자는 얘기는 한국에서 피땀흘려 일한 반도체 근로자들의 성과급(PS)을 미국과 함께 나누자는 말에 해당한다”며 “안 그래도 반도체 인력 확보가 국가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상황에서, 오히려 취업 준비생들에게 반도체 산업에 오지 말라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사주 매입을 금지하는 정책 역시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란 설명도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낮은 상태”라며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가 부양을 바라는 국내 투자자들에게 미국 투자에 대한 원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내외 비판이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일단 ‘침묵 모드’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보조금 신청 여부를 아직 공개하지 않은 삼성전자는 “(보조금 신청과 관련해)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만 밝혔다. SK하이닉스는 “현재까지 밝힐 수 있는 입장이 없다”고 전했다. 다만 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지난해 8월 미국에 반도체 후공정 전초기지와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이기 때문에, 공장 건설이 본격화되면 보조금 신청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에 나설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 적극적으로 생산공장을 건설 중인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칩 위탁생산) 업체 TSMC 역시 입장 표명을 주저하며 난감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정근 한국금융정보통신기술(ICT)융합학회 회장은 “미국이 과도하게 한국, 대만 등 반도체 기업에 요구하고 있고 이는 장기적으로도 미국의 대중 전략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첨단 반도체 기술을 미국으로 다 가져오겠다는 의도로 읽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ra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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