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아주까리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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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을 일일이 곱씹는 건 바보짓이지만 “아주까리기름 먹느냐. 왜 이렇게 깐족대느냐”는 말은 대관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너무 궁금했다. 무지와 경솔을 만천하에 스스로 까발리는 헛소리는 여럿 들어봤지만 이 말은 구체적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듯하면서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까리기름을 먹으면 깐족대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아주까리는 응원가로 부르는 노래 ‘아리랑 목동’에 등장한다.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 아무리 고와도”다. 어깨동무하고 이 노래 부르는 젊은 관중 가운데 아주까리가 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후렴의 ‘아리아리’와 운율 맞춘 의태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1955년 발표한 이 노래는 느닷없이 응원가로 불리면서 가사에 심각한 왜곡이 생겼다. “동네방네 생각나는/ 내 사랑만 하오리까”가 그것이다. 내 사랑이 동네방네 소문나거나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생각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원래 가사인 “몽매간(夢寐間)에 생각 사 자(思字)”가 입에 붙기엔 너무 어려웠던 탓에 변형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차라리 “꿈에서도 생각나는”으로 개사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강원도 아리랑에도 아주까리가 나온다.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다. 여기에서도 아주까리와 동백은 붙어 있다. 두 식물의 씨앗을 짠 기름은 예부터 여자들이 머리에 바르는 미용 기름이었다. 그래서 곱다고 한다. 민요에서 둘이 붙어다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강원도 아리랑은 온다더니 소식 없는 임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임이 안 오시는데 아주까리 열려봐야 곱게 단장할 일 없다는 말이다. 아주까리기름은 사랑의 상징인 셈이다. “아주까리 동백아/ 더 많이 열려라/ 산골 집 큰 애기/ 신바람 난다” 하는 영천 아리랑을 봐도 그렇다.
아주까리기름은 등잔불 밝히는 데 썼다. 그 불빛은 밝지 않고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 ‘정주성(定州城)’에서 읊었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터는 허물어지고 왁자지껄하던 곳엔 인적 없는데 아주까리 등불 희미하다. 시인은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고 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삶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송해의 애창곡이었던 1941년 작 ‘아주까리 등불’도 애처롭다.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바람에 깜박이는 아주까리 등잔불/ 저 멀리 개울 건너/ 손짓을 한다.” 엄마는 언젠가 올 것이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간신히 손짓하는 등불을 보고 개울 건너 집으로 올 것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판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다. 비탄 속에서도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아주까리기름은 먹고사는 일이었고 고단하되 끈질긴 삶의 향료였다.
피마자유라고도 하는 아주까리기름은 윤활유로도 쓰인다. 영어로 아주까리기름은 캐스터 오일(castor oil)인데 영국 자동차 윤활유 회사 캐스트롤(Castrol)은 20세기 초 아주까리기름을 첨가한 윤활유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 제품이 잘 팔리자 ‘웨이크필드’였던 회사명을 아예 캐스트롤로 바꿨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벌인 뒤 전투기 윤활유를 대기 위해 조선의 아주까리를 싹 다 훑어 갔다. 이 악랄한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은 조선 아낙네들이었다.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자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했을 때 김지하는 시 ‘아주까리 신풍(神風)–미시마 유키오에게’를 썼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 처절한 신풍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아주까리엔 민족의 사랑과 그리움과 고단한 삶이 묻어있다. 일제를 겪은 세대에겐 분노와 한이 함께 맺혀있다. 어딜 들쳐봐도 아주까리는 먹고 깐족거리는 풀이 아니다. 특히 아주까리기름은 냄새가 역하고 설사와 복통을 일으키기에 고문할 때 썼다. 맛으로 먹는 기름이 아니다.
다만 이런 속담은 있다.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 놀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뒤질쏘냐’란 뜻이다. 다음엔 어떤 아주까리가 무슨 막말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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