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의 성폭력’이 들려준 이야기

한겨레 2023. 2. 2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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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2019년 9월1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간강죄 구성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50년 전 일어난 성폭력 상담전화를 받았다. “그때 열살이었고 지금 육십이에요.” 통화는 한시간으로도 부족했다. 열세살, 스무살, 서른살,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후, 처음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이 열린 문에서 마구 토해졌다. 왜 잠을 못 자냐고 묻는 친구에게 “내 안에 돌이 있어”라고 말하고 상담기관에 처음 전화하셨다고 했다. 돌을 지니고 산 50년, 바라는 것은 가해자의 사과다.

피해자는 원치 않았던 손과 얼굴이 닥쳐온 문간 자리 이불 속, 누르던 팔과 다리, 자고 있던 옆 사람들, 흐르던 식은땀을 감각한다. 기억이 해리됐다가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반복적으로 재피해를 겪지 않고 치유하고 해결하는 것이 하루도 시급한데 그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 바로 피해자 심문이다.

가족 내 성폭력 피해자인 심이경은 <나는 안전합니다>에서 ‘피해자 심문하기’의 대표 다섯 문장을 알려주고, 그 의미는 ‘결국 서로 합의해서 벌인 일’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오빠가 그런 마음을 먹었겠니?’, ‘너는 왜 가만히 있었니?’, ‘왜 이제야 말하니?’, ‘거짓말하지 마’,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잖아. 너도 좋아서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니야?’ 내가 한동안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가 이 일을 서로 합의해서 벌인 ‘은밀한 놀이’로 어떻게든 몰아갈까 두려웠다.” 내가 겪은 일을, 계속 감각하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상대가 ‘피해자 심문지’를 꺼내 든다면? 말하기는 중단되고 긴 침묵이 시작된다.

올해는 대한민국 형법이 제정된 지 70년 되는 해다. 형법 297조 ‘폭행과 협박으로 강간한 자’를 처벌한다는 요건도 70년 동안 유지됐다. 강간죄의 폭행과 협박은 최협의설에 따라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여야 인정된다. 강간죄의 존재 양식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어?’를 피해자에게 묻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가만히 있었어? 그럼 걔도 좋아서 그랬겠네’가 확산한다.

강간죄 개정은 오랜 의제였다. 법조계·학계의 강간죄와 강제추행죄 최협의 폭행협박설 비판적 논의·연구는 오래됐고, 법원도 2005년께부터 판례를 확대해왔다. ‘미투’ 운동 뒤 강간죄 개정 운동이 본격화돼 20대 국회에서 10건, 21대 국회에서 3건의 개정안이 발의됐다. 국제사회도 한국 정부에 강간죄 개정을 권고한다. 이를 반영해 여성가족부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의 5개 법 개정 과제 가운데 강간죄 개정안이 포함됐다.

그런데 법무부가 반대하고 나섰다.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고, ‘입증 책임이 전환’되면 안 되며 이미 성폭력 유죄가 많단다. 온라인 커뮤니티 일부에서는 ‘성관계 때 계약서라도 써야 하냐’고 조롱한다.

동의 여부는 ‘예’, ‘아니오’ 가운데 선택이 아니다. 현실에서 성폭력이나 성적 실천은 구체적인 상황, 조건, 결과로 이뤄져 있다. 관계와 장소와 인물이 등장하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행위와 사건이 이어진다. 강간죄 개정으로 만들고자 하는 변화는 상대의 취약한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상대에게 불리하게 조성하고, 상대를 속이고, 상대가 동의한 것으로 강요하거나 간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폭행 협박, 위력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적 동의를 ‘예’에 체크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이는 누구인가. 이들은 상대에게 빨리 ‘예’에 체크하라고 채근하거나, 상대가 체크를 바꾸거나 취소하는 것을 싫어하리라. 하지만 성(sexuality)은 정체성과 인격, 몸과 건강 및 재생산, 사회적 소속이나 고용 및 진로, 관계 및 친밀성으로 구성되는 통합적 영역이다. 성적 동의는 모든 이에게 그 통합적 권리가 있음을 보장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법 개정도, 수사기관과 재판부 인식 변화도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간죄 개정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사기관, 법원, 온 국민이 들고 있던 ‘피해자 심문지’를 당장 폐기하는 것. 강간 피해상담 71.4%(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2019)가 어떻게 폭행 협박 없이 가능했는지 일터와 학교, 온라인, 일상에서 살피고 바꾸는 것. 침묵된 이야기를 듣는 것. ‘비동의’, ‘억울함’, ‘적극적 합의’를 거쳐 개인이 타인과 평등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연결되는 것. 이 변화를 함께 적극 검토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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