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10] 조국 프랑스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고는 바닥이었고, 침략자 영국은 수도 앞까지 칼날을 들이밀었지요. 어느 때보다 지도자의 정치력이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왕 샤를7세는 술과 여자에 빠져 있었지요. 유럽의 최강자를 가리는 ‘백년전쟁’에서 승자는 영국인 듯 했습니다. “신께서 ‘가톨릭의 큰딸’ 프랑스를 버렸다”는 말도 공공연히 들려왔습니다.
1443년, 샤를7세는 여전히 취해있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어느 날 밤 파티장에서였습니다. 새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의 여성이 나타납니다. 왕비의 새로운 시녀랍니다. 천하의 색골 샤를7세가 놓칠 리 없었지요. “오호라, 오늘 밤은 심심하지 않겠군.” 여느 때처럼, ‘하룻밤 장난’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런데, 당돌한 이 소녀, 왕 앞에서 겁도 없이 외칩니다. “폐하, 조국 프랑스가 영국에 넘어갈 위기입니다. 부디, 정신 차리세요.” 잔다르크를 떠올리게 하는 당당한 이 소녀는 후에 왕의 정부가 되는 아녜스 소렐이었습니다.
프랑스 학계는 아녜스 소렐이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평가합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역사에서 잔다르크 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라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왕의 애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위기의 단초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평가는 이례적이지요. 그녀는 어떤 인물이었던 걸까요.
위기에 빠진 프랑스...지도자는 주색에 빠져있었다
“전쟁도, 정치도 싫다. 술이나 다오.”
샤를7세는 하루하루 고주망태로 보냈습니다. 백년전쟁 후반기 영국의 기세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왕 헨리5세의 영웅적 활약으로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합니다. 프랑스 선대왕 샤를 6세는 딸 카트린 드 발루아를 헨리5세에게 시집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두 사람의 아들을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트루아 조약’에까지 서명합니다. 왕세자였던 샤를7세는 영국 혈통인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처지였습니다.
영웅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기사회생한 프랑스
“저에게 군사를 맡겨주십시오”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지요. 이때 나타난 인물, 잔 다르크였습니다. 1429년 4월 17세의 소녀가 “신이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내렸다”면서 왕에게 겁 없이 자신에게 군사를 맡길 것을 제안했지요. 샤를7세와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그녀의 ‘처녀성’(성녀라면 마땅히 처녀여야 한다는 당대 인식 때문이었습니다)을 검사했고, 그녀를 전장에 내보냅니다.
잔 다르크는 루아르에서 승리를 거두고, 랭스까지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이 대대로 대관식을 치르는 장소였기에 그 승리는 큰 의미가 있었지요. 우리나라로 빗대자면 임진왜란에서 한양을 수복하고 경복궁을 다시 손에 넣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마침 영국의 영웅 헨리5세가 35살의 나이로 요절해버립니다. 아들 헨리6세는 한 살이 되지 않은 신생아였죠. 샤를7세가 트루아 조약을 무시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다시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물론 영국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프랑스의 왕이라고 주장했지요.
우유부단한 리더십에 다시 발목 잡힌 프랑스
그러나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대관계로 돌아선 ‘내부의 적’ 부르고뉴 공국이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왕가의 혈족이었으나 부르고뉴 공국의 지도자 ‘용맹공’ 장이 반목 끝에 왕가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으로 그들은 척을 지게 됐지요.
부르고뉴는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에 섰습니다. 전장에서 붙잡은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긴 것도 그들이었지요. 잔 다르크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 혐의로 잡혀 화형을 당합니다. 1431년 5월 30일, 그녀의 나이 19살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운명은 안갯속이었습니다.
샤를7세는 다시 외줄 타기 상황에 놓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죽고, 프랑스의 금싸라기 땅인 노르망디와 앙주 지방은 여전히 영국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부르고뉴와 화해했지만 프랑스 국토를 통일하기엔 그의 성격은 너무 우유부단했습니다. 결국 그가 의지한 건 ‘술과 여자’. 그 두가지 뿐이었지요. 이때 아녜스 소렐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암군’ 샤를7세를 각성시킨 왕비의 하녀
아녜스 소렐은 왕비 ‘마리 드 앙주’의 시녀였습니다. 절세미인이었던 20세의 여인에게 샤를7세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죠. 샤를7세의 나이는 40세, 불혹이었습니다. 전쟁에 지친 심신을 달래 줄 여인이라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샤를7세가 진지한 마음으로 구애를 펼친 끝에 아녜스 소렐은 그의 애인이 되기로 결심했지요.
“프랑스의 신하로서 조국의 편에 서시지요.”
아녜스 소렐은 국정을 ‘농단’하는 경국지색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미인이었지만, 동시에 현명한 여인이었고 또 애국자였습니다. 국고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샤를7세를 각성시키는 촉매 역할을 자처했지요. 프랑스를 분열로 몰아넣은 귀족들을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고, 부유한 상인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동방 무역으로 큰 부를 일군 자크 쾨르 역시 아녜스 소렐의 대표적 측근이었죠. 그는 후에 왕의 수석 고문으로서 프랑스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전쟁에 대비할 군자금을 모으는 데 이바지합니다. 귀족들과 상인들은 아녜스 소렐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갑니다. 프랑스의 신하들은 샤를7세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精婦)를 향한 사랑이 다시 프랑스를 일으켰다
프랑스의 곳간은 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샤를7세의 우유부단함은 계속됐지요. “우리가 정말 잉글랜드를 이길 수 있을까.” 그때 아녜스 소렐이 일갈합니다.
“저는 왕의 연인이 될 몸이라고 예언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저의 연인은 잉글랜드의 왕이 되겠네요. 그들이 이 땅을 점령하고 있으니까요.”
샤를7세가 발끈합니다. 자기 여인이 헨리6세의 품에 안긴 모습을 상상하니 미칠 것 같았지요. 다시 군대를 일으킵니다.(미친 사랑의 힘!). 1441년 프랑스군이 샹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에는 포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해 잉글랜드 군을 격파했지요.
프랑스가 대포로 무장할 수 있었던 자금 역시 아녜스 소렐이 국가 재정을 튼튼히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장궁에 의해 박살이 났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칼레’(그 유명한 아퀴스트 로댕의 조각작품 ‘칼레의 시민들’의 배경입니다)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냅니다. 샤를7세가 ‘승리왕’(le Victorieux)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잔 다르크와 아녜스 소렐 두 여인이 빠질 수 없었던 셈입니다. 멍청한 왕이었지만 여자복은 타고났다고 해야할까요. 아녜스 소렐은 ‘경국지색’(나라를 위태롭게 한 미인) 대신 ‘부국지색’(나라를 부강하게 한 미인)이 어울리는 위인이지요.
샤를7세의 ‘찐사랑’…불륜녀를 왕의 ‘공식연인’으로 만들다
샤를7세의 사랑은 시쳇말로 ‘찐’이었습니다. 궁정에서 백년전쟁을 지원한 아녜스 소렐을 1444년 왕의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로 임명합니다. 영어로는 ‘로얄 미스트리스’. 우리말로는 왕의 공식 애인을 뜻합니다. 직함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대내외적으로 왕의 연인임을 선포한 셈입니다.
이제 궁의 정치는 아녜스 소렐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귀빈을 맞을 때 왕의 옆자리는 왕비가 아닌 정부 아녜스 소렐이었지요. 기독교 국가에서 아내를 두고 ‘왕의 연인’이라는 자리를 만든 것만으로도 샤를7세가 그녀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비였던 마리 드 앙주로서는 자신의 하녀가 남편과 바람 피우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까지 그저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이뿐인가요. 샤를7세는 아녜스 소렐에게 왕실의 재산인 로슈 성까지 하사했습니다. 성은 보퉤쉬르마른, 아름다움의 궁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마리 드 앙주의 분노가 어떤 정도였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울화가 전해져서 였을까요, 그의 아들 루이11세는 즉위 후에 이 성을 감옥으로 바꿔버리지요.
아녜스 소렐은 프랑스 궁의 아이콘이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패션으로 유행을 선도했죠. 목과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옷을 착용했고, 옷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드레스도 입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 “몸파는 여성들의 옷”이라고 비난했던 옷차림이었습니다. 가톨릭 신부들은 “악마의 꼬리”라고 비난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그녀의 패션을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토플리스 패션은 그의 미적 감각에서부터 시작돼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녜스가 떠난 뒤에도 계속된 샤를7세의 광태
프랑스 궁정의 핵심인 아녜스 소렐은 백년전쟁 막바지인 1450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28살. 샤를7세의 넷째 아이를 출산하던 중이었죠. 더구나 그는 왕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노르망디 주미에르 지역까지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에게 얼마나 힘을 실어주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프랑스 왕궁과 사교계에서는 루이11세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샤를7세는 아녜스 소렐의 심장을 주미에르 성당에 안치합니다. 시신은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을 나눈 로슈 지역 성당에 묻었습니다. 심장과 시신을 분리해 장례를 치르는 건 왕족의 특권이었죠. 그가 사망한 지 3년 후,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반면, 영국은 전쟁 패배의 후유증으로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그 유명한 ‘장미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절반은 아녜스 소렐의 공이었습니다.
샤를7세는 순애보처럼 그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는 소렐의 사촌 동생 앙투아네트 드 메넬레와 불륜 관계를 이어갑니다.(여긴 동물의 왕국인가요) 프랑스 사학자 앙드레 모루아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아녜스가 죽은 후에도 샤를7세는 음란한 노인의 광태를 지속했다. 그는 유능한 조언자들의 은혜를 잊었으나 행복하고 강대한 프랑스를 남겨 놓았다.
왕의 공식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 제도는 그 이후로도 계속 계승됩니다. 앙리4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나 루이15세의 퐁파두루 부인 역시 로얄 미스트리스였습니다. 왕의 정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정의 주축이자 모든 사교계의 부인들이 선망하는 자리가 되지요. 국가의 대소사가 메트레상티트르를 통해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리더들의 거침없는 사생활의 계보
프랑스의 정치를 보면 유독 낯선 지점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정치 지도자들의 연애에 대한 대중의 태도이지요. 그들이 이혼하건, 불륜 행위를 하건, 나이 차이가 심한 여성과 결혼하건, 프랑스 시민은 “사생활”이라며 일축합니다. 대한민국에서라면 ‘스캔들’이라는 딱지가 당장 붙고 “퇴진” 구호가 울려 퍼졌을 일인데 말이지요.
“정치 지도자라도 사생활은 존중받아야한다”는 의식은 프랑스대혁명, 68혁명 등 누대에 걸친 시민운동의 결과일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발칙한 상상을 해봅니다. 아녜스 소렐과 같은 불륜녀들의 활약이 국가리더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의식의 기반이 된 건 아닐까요. 리더의 불륜이 잉글랜드로부터 조국을 지킨 나비효과를 불렀으니까요. 어디까지나 역사 애호가의 치기 어린 ‘사색’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길.
<네줄요약>
ㅇ중세 프랑스의 왕 샤를7세는 왕비의 하녀 아녜스 소렐과 불륜을 저질렀다.
ㅇ아녜스 소렐은 왕의 적대적인 신하들을 설득하고, 상인을 중용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영국과의 ‘백년전쟁’ 승리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ㅇ샤를7세는 아녜스 소렐의 공적을 인정해 공식 정부(情婦)인 ‘메트레상티트르’로 임명하고 성을 하사한다. 가톨릭 국가에서 이례적인 행위였다.
ㅇ프랑스 정치 리더들의 사생활 존중의 배경에는 이런 ‘영웅적’ 정부(情婦)의 활약이 있지 않을까. (불륜 미화 및 조장 의도는 없습니다.)
<참고 문헌>
ㅇ앙그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ㅇ데즈먼드 수어드, 백년전쟁 1337-1453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미지북스,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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