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10위·민주화·산업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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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의 근현대사 특강 〈1〉

고종은 청일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895년 2월 23일(양력) ‘교육 조칙(이하 조칙)’을 반포한다. 교육을 통해 ‘나라의 원한에 대적할 사람’ ‘나라의 모욕을 막을 사람’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사람’인 ‘국민’을 창출할 의지를 밝힌다. 국한문 혼용체였다. 이후 4개월간, 6월까지 내린 개혁 관련 교서들은 모두 국한문 혼용체였다. 왜 그랬을까. 서민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한문 형식을 버렸다. 1896년 4월 창간한 한글 전용 ‘독립신문’도 같은 이유다. 군주, 즉 고종이 국민 창출을 목표로 관·민 협동 단체로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기관지로 이 신문을 발행하게 했다. 독립신문은 서재필 개인의 신문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종 “대한은 여러분의 것” 주권 이양
덕·체·지. ‘조칙’은 3양(三養)을 신교육의 강령으로 내세웠다.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가 제창한 교육론이 이 땅의 교육 강령으로 채택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고종은 1886년 근대식 왕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만들었다. 3양 교육은 18세기부터 미국 중등교육의 방침이었다. 이 3양 교육을 받은 미국인 교수들이 육영공원에 들어왔다. ‘조칙’은 육영공원의 미국인 교수들, 특히 한글을 높게 평가했던 호머 헐버트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헐버트는 제자 주시경을 독립신문 편집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고종은 신식 교육 조치를 일사천리로 단행했다. ‘조칙’이 반포된 1895년에 한성사범학교, 소학교, 각국 외국어학교 설립이 잇따랐다. 독립신문은 신지식의 샘이었다. 당시 독립신문 광고로 자주 등장한 책자가 있다.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士民必知, 1889)』다. 조선의 선비와 평민이 모두 알아야 할 서양에 관한 지식을 담았다. 신지식을 통해 서민 대중이 국민의 도리를 일깨우도록, 독립신문은 초기 매호에 이 책을 광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07년 2월. 일제의 경제 침탈 속에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신문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이 운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국민’과 ‘의무’라는 표현을 썼다. 나라가 부당하게 진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외쳤다. 운동 본부의 이름 또한 의무사(義務社)였다. ‘의무를 앞세운 국민’의 탄생, 이런 역사는 세계에서 예를 찾기 힘들다.
![고종 황제의 1904년 모습. 고종은 1895년 ‘교육 조칙’ 등 신교육 조치를 잇달아 내면서 ‘국민’의 탄생을 유도했다.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306/07/joongangsunday/20230607145004945odhz.jpg)
1895년 후반 일제는 조선의 자주 개혁에 반발했다. 왕비를 시해해 일본군이 대거 서울로 진입하는 빌미를 만들어 친일 내각을 내세웠다. 군주를 경복궁에 가두다시피 했다. 4개월 뒤에서야 왕은 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갔다. 여기서 개혁정치를 복원하고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앞서 제안된 양전 사업은 1898년 6월 양지아문 설립으로 본격화되었다. 1906년 통감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전국 농지 3분의 2를 정비하는 성과를 거뒀다. 2년 뒤에는 지권을 발급해 소유권(또는 경작권)을 보장했다. 이런 근대적 농정 기반은 생산력과 세수 증대를 불렀다. 한 연구는 대한제국의 예산이 1897년 400여만 원에서 1905년 2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한 것을 밝혔다. 당시 높았던 농업 비중을 고려하면, 지세 수입이 늘면서 예산 증가로 이어졌음을 확신할 수 있다. 1905년 ‘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의 경제는 번성 일로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1907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우다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난 고종은 1909년 3월 15일에 태황제로서 의미심장한 칙유를 내린다. “대한은 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이라고 주권 이양을 선언했다. 그리고 “민은 자유라야 하며 나라는 독립국이어야”라고 천명하면서 “여러분이 교육을 통해 자유민으로 힘을 키워 훗날 광복에 성공해 달라”고 당부했다.
일제 국권 침탈로 자주적 번성의 길 막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일제 치하의 한국인을 “노예와 같은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의 농지개혁안을 준비했다. 전쟁 뒤 해방된 한국의 농민들을 자영농으로 자립시키며 사회주의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에 사망했지만, 미 국무부가 준비한 농지개혁안은 미 군정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에 다시 넘어갔다.
![지난해 8월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발행한 호머 헐버트 우표. 헐버트는 덕·체·지 ‘3양’을 내세운 대한제국 신교육 강령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연합뉴스]](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306/07/joongangsunday/20230607145007805fbvj.jpg)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출범한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 정책은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이었다. 17년간의 장기 집권체제 아래 4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그 후 신군부의 두 차례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 선언을 거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의 발돋움했다.
![1895년 2월 2일(음력) 자 관보에 실린 ‘교육 조칙.’ [사진 이태진]](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306/07/joongangsunday/20230607145009131jfvn.jpg)
![광무 7년(1903) 8월 1일 발행한 지계. [사진 이태진]](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306/07/joongangsunday/20230607145011076trp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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