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세상의 모든 목간(木簡)

기자 2023. 2.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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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하루 만에 간단히 저문다. 아침에 이립하고, 점심에 불혹 흉내 내렸더니, 어느새 이순의 저녁이다. 캄캄한 어둠으로 전환될 때를 대비하여 새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구슬피 운다. 하루의 수고를 다독이며 귀를 열고 밤으로 가는 입구인 여섯 시에 시작하는 라디오를 듣는다. 세상의 모든 음악. 세상은 사물이 많지만 사연도 더 많이 쌓이는 곳이다.

사내 둘을 키우는가 보다. 큰애는 대학생인데 동생은 이제 초등학생. 막내는 어릴 때 몹시 아팠다고 한다. 고통의 긴 터널을 뚫고 나와 형 곁에 누워 지금 방송을 함께 듣는 중이다. 밥솥에 쌀을 안치고 된장국에 불을 올리며 고기 찾아 냉장고 문을 열다가 거실을 보았다. 엄마는 이 광경이 사무치게 좋았던가 보다. 그래서 신청곡에 매달아 이런 사연을 보낸 것. “막내야, 네가 태어나 우리집으로 와주어 너무 고맙구나.”

2023년과 계묘년은 전혀 다른 세월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한번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계묘년의 토끼는 언젠가 굴렁쇠를 굴리며 또 온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접힌 시간을 60년의 간지로 스물두 바퀴 남짓 뒤로 돌리면 백제가 무너질 무렵이다. 그때도 저무는 저녁 끝에 밤은 오고 식구들은 둘러앉았겠지. 사방이 온통 소리통이고 모두가 가수다. 목울대의 시퍼런 핏줄을 타고 노래는 흐르고. 소음도 광고도 없는 깨끗한 공기 속 서로의 맥박 소리 낭랑하고.

종이가 없던 시절. 백제인들은 목간에 논어도 적고 구구단도 공부했다. 이런 ‘숙세가’도 남겼다. “宿世結業(전생에서 인연을 맺어)/ 同生一處(한곳에 태어나 같이 살아갑니다)/ 是非相問(옳고 그름은 서로 물어야 하는 것)/ 上拜白來(하늘에 절한 후 말씀 나누러 오세요).” 견딜 수 없을 만큼 너무 좋아 귀신도 울고 갈 백제의 노래.

목간은 손가락 두 개 크기의 나무공책이다. 그도 귀히 여겨 때때로 대패로 밀어 재사용했다고 한다. 경박한 비유지만 말려나오는 대팻밥은 가다랑어포와 매우 닮았다. 가다랑어의 살을 저며 김에 쪄서 말린 뒤 푸른곰팡이로 발효시킨 가공식품. 이 단어는 아직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르지 못했지만 실물은 웬만한 마트에 다 있다. ‘땡기네’, 오늘따라 몹시도 저 국물이. 나는 조금 울적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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