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보험으로 애국애족…大山의 위대한 유산과 철학, 지금도 교보생명에서 실천중”

신찬옥 기자(okchan@mk.co.kr) 2023. 2. 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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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의 스승’으로 불린 故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매경·경영학회 선정 ‘대한민국 기업가 명예의 전당’ 헌액

고(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무학(無學)이다. 그는 이력서 최종 학력란에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라고 쓰곤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은 학력(學歷)이 아니라 ‘학력(學力)’을 쌓아왔다는 의미다. 그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배움이었다.

‘교육과 보험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기업가로 영원히 남고 싶다’던 그를 22일 한국경영학회와 매일경제가 대한민국 기업가 부문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신창재 회장이 말하는 ‘나의 아버지 大山’◆
대담=송성훈 매경 금융부장
‘대산(大山·신용호의 호)’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폐결핵 투병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열일곱살부터 고전으로 ‘1000일 독서’를 시작했고, 책으로 세상과 인생을 배웠기 때문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라면서 국가와 민족에 눈을 떴고, 장성해서는 성공한 자본가가 되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라는 화두가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일생을 이끌었던 배경이다.

이런 그의 철학은 1958년 교보생명(당시 대한교육보험)을 창립하며 꽃을 피웠다. 돈이 없어 못 배우는 설움이 없도록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했고, 광화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국가대표 서점을 세웠다. 국내 최초로 암보험을 개발하고 종업원퇴직적립보험을 출시하는 등 한국 보험산업 발전을 선도했다. 그 공로로 세계보험협회(IIS) 세계보험대상을 받았고, IIS에서 보험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보험 명예의 전당 월계관상’까지 수상했다.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민족의 미래’라는 대산의 신념은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 교보교육재단 설립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문학과 교육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한국경영학회 ‘대한민국 기업가 명예의 전당’ 헌액을 기념해, 아들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에게서 대산의 삶과 사업에 대한 철학을 들었다.

신창재 회장은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3층 회장 집무실을 선친이 쓰던 그대로 유지하며 사용하고 있다. 교보생명 경영철학이 담긴 세개의 다리가 있는 향로, 책상과 가구, 벽지 하나까지 신용호 창립자의 손이 안 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1999년 광화문 교보생명 1층 그린하우스에서 부자가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교보생명]
-헌액을 축하드린다. 선친 대신 소감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

▶깊이 감사드린다. 선친께서도 고맙고,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실 것이다. “교육과 보험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기업가로 영원히 남고 싶다”는 것이 선친의 평생 소신이었는데, 이같은 철학은 지금도 교보생명이 더 좋은 기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조부와 백부, 선친까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알려져있는데.

▶조부인 신예범 선생은 일제강점기 야학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일본인 지주의 농민수탈에 항의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하셨다. 백부인 신용국 선생은 호남 지방의 항일운동을 이끌며, 3.1만세운동에 투신하셨고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선친도 청년시절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이육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자금을 댔다. 당시 이육사 선생이 “모쪼록 큰 사업가가 되어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라며 격려했다고 들었다.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 선친을 평가한다면.

▶선친은 1940년 베이징에서 ‘북일공사’를 설립해 곡물 유통업으로 성공을 거뒀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해방 후 귀국해 출판사, 방직회사, 제철회사를 창업했지만 6.25 전쟁과 같은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사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 결국 교보생명을 창립해 키웠다. 이런 삶의 과정을 보면 선친은 전형적인 앙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 즉 통찰력으로 미래를 개척해온,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신을 지닌 경영자였던 것 같다. 가장 존경스러운 점은 본인이나 회사의 부(富)를 쌓는데 치중하셨던 게 아니라 당시 어려운 사회 상황에 맞춰 애국애족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앞장섰다는 점이다.

-창립자는 사업확장보다 보험 본연의 업(業)에 집중하셨다.

▶선친은 평생을 그 생각으로 경영하셨던 기업가였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대기업 경영자들과는 달리 관계사 수를 늘리는 식의 그룹 세력을 확장하는데에는 평생 관심이 없었다. 넓게 하는 회사경영보다는 깊이 있는 회사경영을 추구하신 셈이다. 제가 1996년 교보생명에 입사해 약 7년간 선친의 경영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도 아주 뛰어난 리더십 역량을 갖춘 분이셨다. 리더로서 갖춰야 할 불굴의 의지와 개척정신도 대단했지만, 비전을 제시하고 감성적으로 공감하면서 의사소통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이 특히 탁월했다.

-평생 책을 사랑하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은 창립자의 일화가 귀감으로 남아 있다.

▶어린 시절 폐결핵을 앓았던 선친은 오랜 투병생활로 입학 적령기를 놓쳤고,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미국 링컨 대통령이나 철강왕 카네기는 어릴 때 가난해서 변변히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부지런히 책을 읽어 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지식이 깊었다는 선배 말에 고무되어 책을 파고들었다. 독학으로 말과 글을 깨우치고 학교 교과서는 물론, 나중에는 신문이나 소설과 세계문학전집까지도 섭렵하게 된다. ‘1000일 독서’를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진리를 깨달은 선친에게 책은 인생의 스승이자 나침반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결국 교보문고의 설립으로 이어졌는데, 선친은 틈만 나면 교보문고 매장을 돌아보며 청소년들이 책을 읽는 모습에 기뻐하셨다고 한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예술가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다. 사옥을 설계할 때마다 건물 외관은 물론 내부동선과 재료 하나까지 직접 챙겼고, 그 결과 누가 봐도 교보빌딩인줄 알 만큼 정체성이 담긴 건물이 탄생했다. 사진은 1993년 유명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 교보 강남사옥 설계를 논의하는 모습. 신 창립자는 박물관만 설계하는 마리오 보타에게 디자인을 맡긴 뒤 10년에 걸쳐 설계를 수정했다. [사진제공=교보생명]
교보사옥 완공 즈음 ‘책방’ 구상
임원들 돈 안된다며 반대했지만
“그 이상 나라 위하는 일 있나”

“세상에 공짜와 비밀은 없다”
거저 이익 얻으면 요행만 바라
편법적 사세확장 극도로 경계
‘정직과 성실’ 정도경영 밑바탕
-교보문고를 설립할 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던데.

▶1980년 서울 종로구 종로1번지에 교보생명 광화문 사옥이 완공될 무렵 임직원들은 지하에 엄청난 임대수익을 안겨줄 상가가 들어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선친은 창립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서울 한복판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서점이 있어야 한다’면서 책방을 구상했다. ‘돈이 안된다’며 반대하는 임직원들에게 선친은 “책을 많이 읽은 청소년들이 나중에 커서 작가나 대학교수, 사업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도 탄다면 그 이상 나라를 위하는 일이 어디 있으며, 얼마나 보람 있는 사업입니까”라며 설득했다. 현재 교보문고는 회원수 1800만명에 매년 5000만 명이 방문하는 ‘국민책방’이자 지식·문화의 광장이 됐다. 선친의 소원이 이뤄진 셈이다.

-창립자 별세 후 회장님 일가가 1830억원을 상속세로 납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선친은 평소 ‘세상에는 거저(공짜)와 비밀이 없다’라는 신조를 갖고 계셨다. 사람이 거저 이익을 얻으면 노력없이 자꾸 요행만 바라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남을 속이거나 음해하기 쉬운 법이니 불로소득은 결국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셨던 거다. 회사 경영에 있어서도 정치적으로 도움 받거나 편법으로 사세를 키우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다. 이런 정신은 교보생명의 핵심가치인 ‘정직과 성실’로 계승되어 오늘날 교보생명이 투명경영, 윤리경영을 선도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러한 철학이 밑바탕에 있으니, 상속세를 성실하게 납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창립자님은 울림이 큰 어록도 많이 남기셨는데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선친이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력서 최종 학력란에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라고 쓰셨다. 학력(學歷)이 아니라 학력(學力)을 쌓아왔기에, 현장경험을 통해 배우는 실무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이론지식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던 거다. 그러니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배움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선친은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자기개발과 인간성장을 일생 동안 추구하셨다.

또한 선친께서는 신입사원들에게 “히말라야의 깡마른 산양이 되라”고 자주 당부하셨다. 산양을 방목하면 벼랑 위로 오르며 풀을 뜯는 양은 당장은 말랐어도 오를수록 새로운 풀이 있어 생명이 긴 반면, 아래의 풀만 먹는 양은 지금은 살이 쪘지만 머지않아 굶어 죽는다고 한다. 이처럼 당장 편한 것을 찾기보다 힘든 일을 감내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면 나중에 전문가가 되고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평생 보험 외길을 걸어온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보험의 스승’이었다. 세계보험협회가 수여하는 세계보험대상과 명예의 전당 헌정을 동시에 이룬 보험인은 세계적으로 11명에 불과하다. 신용호 창립자(오른쪽 둘째)가 1987년 천안에서 열린 세계보험협회 총회에서 외국인 참가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교보생명]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인터뷰◆
생명보험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생각
단순히 금전적인 사업 아닌 그 이상의 의미
‘사랑의 정신’ 확산시킨 경영자로 남고싶다

IMF직후 2000년 회장 취임해
선친 뜻 이어받으며 혁신 드라이브
산부인과 의사경험, 인본경영에 도움됐다
가장 어려웠던 건 ‘체질 개선’
‘기버(Giver)’같은 기업 키우고 싶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선친의 철학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걸맞는 혁신 드라이브로 회사를 키웠다. 신 회장은 “국민교육에 대한 신념과 인본주의적 기업문화는 교보생명 경영철학의 뿌리다. 저 또한 산부인과 의사로서 시험관 아기를 연구하며 생명의 경이로움과 소중함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다. 이런 철학이 인간존중과 사람중심 경영을 추구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신창재표 교보생명 경영의 키워드는 ‘인본주의적 이해관계자 경영’이다. 모든 이해관계자와의 공동발전을 추구한다는 지속가능경영철학이 바탕인데, 이해관계자 모두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균형 있는 성장을 추구한다. 회사가 단순한 이익창출을 넘어 고객, 재무설계사, 임직원, 투자자, 정부, 지역사회를 균형 있게 고려할 때 기업의 이익은 더욱 커지고 지속가능경영의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신 회장은 강조한다.

-20년 이상 오너 최고경영자로 책임경영을 해왔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나.

▶저는 생명보험이 애초 기독교정신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을 믿는 편이다. 기독교에서 바라본 생명보험은 내가 (보험료를 내서)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불의의 사고를 당한 계약자)을 돕게 되면, 하느님이 이를 사랑의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언젠가 내가 어려움(사고)에 처했을 때 하느님이 (보험금 지급을 통해) 내게 은혜를 돌려 주시는 제도다. 그런데 요즘 일부에선 생명보험을 단순히 보험회사와 계약자 간에 돈을 주고 받는 금융비즈니스로만 인식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저는 생명보험의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확산시키려 애쓴 경영자로 남고 싶다.

-의사 출신 경영자로 업계 관행을 타파하고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돌아보니 경영의 패러다임(체질과 조직문화)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제가 회장에 취임한 2000년에 교보생명은 IMF 외환위기 후유증으로 큰 시련에 직면해 있었다. 위기를 정면돌파하기 위해 임직원들과 함께 대대적인 경영 혁신에 착수했다. 외형경쟁 대신 고객중심, 이익중심의 ‘퀄리티 경영’을 통해 내실있는 성장에 집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잘못된 영업 관행을 뜯어고치고 영업채널도 정예화했다. 2011년부터는 보장유지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평생든든서비스를 선보여 영업중심이 아닌 고객보장 중심의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후계 구도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는데

▶현대 경영에서 경영권은 주식지분의 크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과를 창출하는 경영능력이 좌우한다고 본다. 경영능력이 가장 중요하며, 경영을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겠다는 원칙은 변함없다. 물론 자식들도 충분한 경영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후보가 될 수 있을 거다. 충분한 경영능력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을 거쳐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회장님도 시인이자 애서가로 알고 있다. 최근 인사이트를 얻었던 책을 소개한다면.

▶애덤 그랜트 와튼스쿨 교수가 쓴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가 기억에 남는다. 성공의 사다리를 보면 ‘받기만 하는 사람(Taker)’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Giver)’보다 항상 위에 있지만, 놀랍게도 사다리의 최상위층에는 기버(Giver)가 있다는 내용이다. 길게 보면 ‘주는 사람이 크게 성공한다’는 메시지인데 인생살이는 물론 기업경영에도 참고해야 할 통찰이다. 이익이란 그림자와 같아서 회사가 돈(이익)만 좇다 보면 돈은 늘 도망가지만, 고객을 좇다보면 돈(이익)은 결국 그림자처럼 뒤에서 따라오는 법이다.

22일 연세대 백양누리홀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대한민국 기업가 명예의전당 헌액식에서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를 대신해 아들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기념패를 수상했다. 신 회장(가운데)이 한상만 한국경영학회 회장(왼쪽), 서양원 매일경제신문 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가 걸어온 길
△1917년 전남 영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출생 △1936~1946년 중국 다롄, 베이징 등지에서 곡물유통사업(이육사, 신갑범 등 독립운동가와 교류) △1958년 대한교육보험 창립, 세계 최초 교육보험 창안 △1981년 교보문고 설립 △1983년 세계보험협회(IIS) 세계보험대상 수상 △1991년 대산농촌재단, 1992년 대산문화재단, 1997년 교보교육재단 설립 △1996년 IIS ‘명예의 전당 월계관상’ 수상, ‘금관문화훈장’ 수훈 △2000년 APO국가상 수상 △2003년 타계(향년 8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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