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79>새정부 과기처 장관에 이정오 박사

이상목 2023. 2. 2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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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9월 3일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0년 8월 16일. 광복절 이튿날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이날 오전 10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TV와 라디오 생방송 특별성명을 통해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사임 발표에 정국은 한순간 시계(視界) 제로 상태로 들어갔다. 최 대통령은 특별성명에서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고 국민 화합과 단결 위에 밝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오늘 대통령직 사임이라는 중대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이날 특별성명은 15분 동안 진행했다. 그 자리에는 민관식 국회의장직무대리, 이영섭 대법원장,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최 대통령은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취임 8개월 10일 만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최 대통령의 사임으로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박 서리는 정권 이양을 서둘렀다.

그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오전 10시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전국 대의원 2540명 가운데 252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전 후보는 찬성 2524표, 무효 1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경남 합천에서 빈한한 농가의 5남으로 태어나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했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을 지낸 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9사단 29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뒤 제1공수특전단장을 지냈다. 육군 준장 진급 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했고, 소장 진급 후 1사단장으로 나가 제3 땅굴을 발견해 5·16 민족상을 받았다. 국군보안사령관을 거쳐 10·26 사태 후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28일 오전 청와대로 첫 등청해 11대 대통령으로서 집무에 들어갔다.

그해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은 오전 11시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취임식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을 비롯해 3부 요인과 주한 외교사절단, 교육자, 새마을지도자 등 사회각계 인사 9000여명이 참석해서 새 정부 출범을 축하했다. 취임식은 개회선언,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의 식사, 대통령 취임 선서와 취임사, 꽃다발 증정, 대통령 찬가 제창, 폐식 선언 순으로 50여분 동안 진행했다.

전 대통령은 선서 후 취임사를 통해 “자유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 나가겠다”면서 “정부는 앞으로 기업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자유롭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기업에 대한 과잉보호를 지양하고 지원 시책을 재검토 정비해서 기업 체질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 대통령은 “경제운용 방식을 민간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며, 기업은 경영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면서 “중화학공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로 수출진흥에 주력하고 금융질서 쇄신, 공정거래질서 확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취임 이튿날인 9월 2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새 정부를 이끌 조각(組閣)을 발표했다.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은 조각 발표에 앞서 오전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전 대통령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들의 사표를 수리한 뒤 곧바로 새 정부 국무총리서리에 남덕우 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발탁했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는 신병현 상공부 장관을 기용했고, 과학기술처 장관에는 이정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 겸 한국과학원(현 KAIST) 원장을 임명했다. 전 대통령은 첫 조각에서 국무위원 가운데 14명을 교체하고, 재무 등 9개 부처 장관은 유임시켰다. 이웅희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조각 명단을 발표한 후 “새 정부는 능력, 청렴, 세대교체라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내각을 구성했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한국 경제 사정은 위기였다.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4.8%, 도매물가 상승률은 42.3%였다. 무역적자도 44억달러였다. 파탄 직전의 경제 상황이었다. 새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물가안정과 경제 회생이었다. 조각도 경제위기 극복에 초점을 맞췄다.

전두환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국무총리에는 고심 끝에 남덕우 전 부총리를 임명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특보 등을 역임하며 수출 드라이브와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을 주도해 온 분이다. 파탄 직전의 경제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데 과거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그를 총리에 기용했다.”(전두환 회고록)

남덕우 전 부총리는 당시 대통령 경제특보를 그만두고 미국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지역협력 방안 모색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논문 초고를 완성할 무렵인 그해 8월 초 일시 귀국했다. 그때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원장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와 연희동 전 위원장 자택에서 만났다. 남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과도기 혼란을 줄이기 위해 계획적이고 질서 있는 민주화 계획을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가 하와이로 돌아간 8월 하순 어느 날.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유학성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이었다.

남덕우 총리의 생전 회고. “유 부장이 '8월 말까지 꼭 돌아오시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오시면 알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김포공항에 도착했더니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있던 서정화 씨가 비행기 승강대까지 마중을 나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축하합니다. 내일 총리로 임명되실 겁니다'라고 했다.”

남 총리는 한국 경제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개발경제의 주역이었다. 그는 사생활에 흠이 하나도 없고, 특히 청렴했다. 새 정부 총리 인선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 발탁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장관으로 임명되자 일반인들은 “어떤 인물이야?”라며 궁금해했다.

이정오 장관은 경북 의성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3기로 졸업하고, 중령으로 예편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석사, 미국 터프츠대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중앙대 교수를 거쳐 1974년부터 한국과학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이 장관의 제자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1호 박사인 양동렬 전 KAIST 교수는 “이(정오) 교수는 강의를 잘했다. 교재 없이 빈손으로 들어와서 강의해 학생들 기를 팍 죽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장관 임명 10여일 전인 그해 8월 22일 열린 한국과학기술연구소·한국과학원·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이사회에서 소장·원장·이사장 등 3개 각 기관장에 선임됐다.

그해 9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남덕우 국무총리서리를 비롯한 신임 국무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전 대통령은 이어 신임 장관들과 간담회를 갖고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자면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복지국가를 건설하려면 경제성장을 이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해 9월 13일.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은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과학기술 정책 구상을 밝혔다. 이 장관은 “앞으로 복지국가 건설의 핵심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 연구소의 과감한 통폐합 등 연구 능률 극대화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유사·중복 연구기관 통합문제는 관련 부처와 협의해서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면서 “연구 풍토 조성을 위한 재원을 확대하고, 늦어도 9월 안에 과학기술 정책 개혁안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장기 국가과학기술 정책 수립 △연구운영 체제 확립과 연구실적 평가 강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연구 풍토 조성 △고급두뇌 양성을 위한 해외 연수훈련 강화 △민간 연구소 기술개발 유도와 국제경쟁력 강화 등을 역점 정책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이 밝힌 연구기관 통폐합 문제는 국내 연구기관들의 존폐가 걸린 일이었다. 국보위 경과분과위도 이미 통폐합 원칙을 정한 바 있어 이 문제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나 다름없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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