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 설계 김수근…그는 ‘고문 공장’ 알고 있었을까

임석규 2023. 2. 2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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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미궁의 설계자’
연극 <미궁의 설계자>의 한 장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유경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일세를 풍미했다. 지금도 국내 건축계에서 ‘현대 건축의 버팀목’으로 추앙받는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는 이 건축가를 심판대에 세운다. 악명 높은 고문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그가 설계했기 때문이다. 김수근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으로 활용될 것을 알고도 이 음산한 건물을 설계했을까. 이 연극이 김수근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이다. 하지만 선악의 이분법으로 일도양단하지는 않는다. 객석의 관객들이 판관이 되어 각자 판단할 수 있도록 찬반 논리와 근거를 비교적 충실히 제공한다.

연극은 3개의 시간 축을 오가는데, 설계자 신호의 1975년, 피해자 경수의 1986년, 해설사 미숙과 기자 나은의 현재 시점이다. 김수근의 조수로 설정된 신호는 권력과 예술 사이에서 번민한다. 김수근에게 국가권력은 최대 건축주였다. 그는 여의도 개발 등 대형 재개발 프로젝트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남산 자유센터(현 한국자유총연맹), 중앙정보부 정동분실(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부여박물관, 올림픽 주경기장 등 숱한 국가 건축물을 설계했다. 김수근이 자신의 이름을 감추면서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의 한 장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유경오

무대는 김수근의 과오와 유무죄를 따지는 법정과도 흡사하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변모한 대공분실 해설사 미숙은 검사처럼 증거를 제시하며 김수근의 책임을 묻는다. 굉음을 내며 기계장치로만 움직이는 육중한 철문, 빙빙 돌며 오르는 동안 방향감을 상실하게 하는 나선형 계단, 비좁게 만든 5층 창문, 기이하게 작은 욕조 등등. 설계자가 이 건물의 용처를 모를 수 없었다며 미숙이 내미는 증거들이다. 반면, 카메라를 든 기자 나은은 변호사처럼 김수근은 용처를 알지 못했을 거라고, 설계자가 아니라 건물을 악용한 사람들이 문제 아니냐고 변론한다. 예컨대, 나선형 계단과 좁고 긴 창문은 김수근 건축의 조형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고 항변한다. 실제로 김수근은 여러 건축에서 나선형 계단과 좁고 기다란 창문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해설사는 다시 반문한다. 나선형 계단이 하필 고문이 행해진 5층하고만 연결된 이유가 뭐겠냐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눈이 가려진 채 이곳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며 느꼈던 생생한 공포를 증언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고.

피해자 경수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고문으로 희생된 서울대생 박종철을 연상하게 한다. 연극의 원제도 <509호실, 미궁의 설계자>였다. 경수가 무대를 빙빙 돌며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고통 없이 보기는 어렵다. 연극이 끝나고 김수근이 설계한 아르코예술극장 나선형 계단을 오르며 이 장면을 떠올리는 건 기이한 체험이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의 한 장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유경오

연극에서 신화 속의 건축가 얘기가 나온다. 크레타 왕 미노스의 지시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감금할 미궁(迷宮)을 짓는 건축가 다이달로스 말이다. 서슬 퍼런 독재자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건축가 김수근은 무죄인가. “권력 비호의 처세가였다고 그를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문의 설계자였다는 비난은 죽은 건축가에 대한 모독이다.” 건축가 서현이 김수근에 관해 쓴 대목이다. 하지만 이 연극을 연출한 안경모의 판단은 다르다. “건축 상세도면을 보면 사용 용도를 명확히 이해했다는 설계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요.” 안경모 연출가는 “우리가 그 시대를 반성한다면 그 책임에 대해서도 따질 필요가 있다”며 “다만 그 과정에서 공이 과를 지우거나 과가 공을 지우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연극집단 ‘반’의 <미궁의 설계자>는 오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극, 뮤지컬 분야 대본 공모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작품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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