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인물과 식물] 양귀비(楊貴妃)와 양귀비
몬브뢰첸이라는 독일 빵이 있다. 양귀비씨를 뿌려 구운 빵으로, 그야말로 ‘겉바속촉’의 전형이다. 아침 식사용으로 자주 먹는 이 빵을 독일에서 처음 보았을 때, 적잖이 놀랐다. 아편전쟁의 불씨였던 양귀비씨를 빵에 뿌리다니!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양귀비 하면 쉬쉬하던 때라 직접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후 유럽의 들판에서 만난 개양귀비꽃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개양귀비의 목이 긴 꽃자루와 붉고 하늘하늘한 꽃잎이 무척 고혹적이라는 것과 모네의 작품 속에도 등장하는 꽃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개양귀비(Papaver rhoeas)는 양귀비와 학명이 다르다.
양귀비의 학명(Papaver somniferum)에서 종소명 솜니페룸은 라틴어로 ‘잠이 오게 하는’, 또는 ‘최면의’라는 뜻이 있다. 양귀비 열매가 고대 그리스의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의 상징이고, 모르핀(Morphine)은 여기서 파생되었다. 양귀비 열매껍질에 상처를 내어 흘러나온 유액을 굳힌 것이 아편이다. 그 열매 안에 들어 있는 씨는 성분이 약해 식용으로 자주 이용된다.
중국에서는 양귀비를 흔히 ‘잉소(罌粟, 앵속)’라고 한다. 호리병 모양의 열매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에 ‘양고미(陽古米)’라고 불렸다가 조선 후기 <물명고>에 양귀비로 서술되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예원지에는 ‘정성으로 기르면 온갖 자태를 보인다’라고 기록되었다. 꽃이 아름다워 당 현종의 애첩 이름인 양귀비(楊貴妃)를 본떠 그 이름으로 정착된 것인데, 양귀비란 꽃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만 불리는 이름이다.
경국지색과 동시에 악녀로도 묘사되는 양귀비는 당 현종의 정신을 쏙 빼놓아, 나라를 말아먹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에 눈이 멀더니, 결국 죽음 앞에서는 그녀를 내팽개치고 신의마저 저버린 현종이 더욱 치졸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근세에는 앵속(양귀비) 때문에 청나라와 영국이 아편전쟁까지 벌였으며, 그 여파가 조선에까지 미쳤다. 중국에서 마약사범을 매우 엄하게 처벌하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마약범죄가 급증하자, 정부는 특별 수사팀을 신설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래저래 양귀비라는 인물에게도, 또 양귀비라는 식물에도 부정적 시선이 많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다 쳐도 식물이 무슨 잘못인가. 독은 곧 약이 되니,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양귀비는 죄가 없다.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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