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뿌리지도 않은 농약 때문에' 수억 날린 감귤농민 "속이 문드러집니다"

2023. 2. 2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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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세자매농장, 재심사·청문절차 요청 불구 '묵살'
‘다윗과 골리앗 싸움’ 행정심판 이겼지만 분쟁 여전
감귤피해·소송비용·고객 신뢰하락 ‘속앓이만’
비산피해 등 억울한 농가 적지 않은 게 현실
“현행 인증제도 폐해 개선해야” 목소리 이어져
뿌리지도 않은 농약으로 친환경유기농 인증이 취소되면서 팔지 못한 감귤 수만개가 바닥에 방치돼 있다. 서인주 기자

[헤럴드경제(제주)=서인주 기자] “지난 18년간 제주에서 친환경 유기농법을 고집하며 감귤을 키워왔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아 손도 많이 가고 잔일도 많은 유기농법을 고집한 이유는 종교와도 같은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증기관의 이해할 수 없는 업무 처리로 모든 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난 18일 찾은 제주 서귀포시 호근북로의 세자매반디농장(대표 김영란). 이곳에는 팔지 못한 감귤 수만개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처박혀 있다. 수천평 감귤밭 고랑에는 달고 상큼한 감귤이 본연의 빛과 맛을 잃은 채 썩어가고 있었다. 전량 직거래로 거래되는 세자매반디농장 감귤은 올해 고객들께 전달되지 못했다. 뿌리지도 않은 농약이 검출됐다는 이유로 친환경 유기 인증이 취소됐고 곧이어 소송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농민이 인증기관을 상대로 행정심판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사건은 초유의 사건으로 회자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한 최초의 사례다. 서인주 기자

농산물품질 인증기관의 석연치 않은 판정에 농가가 요청한 재심사, 청문 절차가 사실상 묵살됐다. 결국 1억원 가까운 피해로 이어졌다. 인증이 취소되면서 폐기 처분된 감귤만 6000만원 상당이 넘는다. 지난 18년간 수백명의 단골손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브랜드가치와 신뢰마저 떨어졌다. 여기에 농민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행정심판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참다못한 김 대표는 총대를 맸다.

발단은 지난해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자매반디농장 감귤밭에서 채취한 시료에서 농약 2종이 미량 검출됐다는 통보를 인증기관으로부터 받았다. 농가는 곧바로 재심사와 청문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8월에 인증이 취소됐다. 현행법에 따르면 농가의 이의가 있을 때 재심사와 청문을 요청할 수 있다.

제주 감귤밭은 다른 농장과의 거리가 짧아 비산에 의한 농약검출이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서인주 기자

김 대표는 비산 가능성을 제기했다. 바로 옆 관행농의 밭에서 농약이 흩날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인근 감귤밭에서 시료를 채취해 또 다른 검사기관에 맡긴 결과, 검출된 것과 같은 성분이 나왔다. 하지만 인증기관인 제주대학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행정심판으로 이어진 배경이다.

이번 소송은 ‘골리앗과 다윗’ 싸움으로 평가됐다. 동료 농가에서도 “기관을 상대로 농민이 이긴 적이 한번도 없다. 억울하지만 참아라”며 만류할 정도였다.

하지만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김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중앙행정심판위는 법에 명시된 청문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점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초유의 일이다.

김영란 세자매반디농장 대표가 감귤밭에서 감귤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서인주 기자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 대표가 인증 회복을 요구하는 반면 인증기관은 청문을 하자고 맞서고 있다. 농가가 행정심판까지 가서 이긴 경우 인증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선례도 없는 상황이라 양측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김 대표는 현재 손해배상청구도 준비 중이다.

판결 소식은 전국 친환경 농업인들에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현행 인증제도의 폐해를 개선하자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김효준 제주친환경농업협회장은 “비산 등 비의도적 농약 오염으로 피해를 보는 친환경 농가가 적지 않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농약 검출 여부’ 중심의 인증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면서 “많은 농가가 억울함을 협회에 호소하는데 대부분 농가가 소송이나 행정 처분 절차를 몰라 인증을 포기한다”고 설명했다.

유기농 인증 취소로 판로가 막힌 감귤은 6000만원이 넘는다. 서인주 기자

김 대표는 “승소를 했지만 인증기관이 곧바로 인증 회복시켜 주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 시 청문회를 해서 자격 정지 처분이 내려지면 농산물 손해액, 지원사업 혜택 등을 모두 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를 노린 꼼수”라면서 “무조건 농약이 나왔기 때문에 농가 책임이라고 하는데 사건 초기에 투명하게 공정하게 재검사만 했어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대한민국 농업 현장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 처분으로 인증 취소된 건수는 2020년 2479건, 2021년 3968건으로 알려졌다. 유기농법을 어긴 농가도 있지만 비산 등으로 피해를 본 억울한 농가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농림축산식품부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인증기관이 재량으로 재심사 여부를 결정하던 것을 농가가 신청하면 반드시 재심사하는 내용으로 ‘친환경농어업 육성 및 유기식품 등의 관리·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을 손질해 최근 입법예고했다. 이에 앞서 인증기관의 농약 오염 확인 방법 등을 개선하기 위해 표준 매뉴얼을 만들어 보급했다.

수십년간 친환경농사를 지어온 농부 A씨는 “오염원이 없던 조선시대로 돌아갈수도 없고 지구상 어디에서도 미세먼지에 자유로울 수 가 없다” 며 “수십년전에도 사용한 농약이 잔류돼 있거나 비산 등의 문제로 친환경농업 원칙을 잘 지켜나가는 농가들이 의도하지 않는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인증제도 전반의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한 관계자는 “농가가 승소하는 일은 매우 드문 사례다. 인증 취소 당시 인증 전문기관인 제주대학 의견을 반영했는데 선례가 없다 보니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게 됐다” 면서 “농약이 나온 것은 팩트다. 이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할 수 있도록 당사자 간 합의를 도출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si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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