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그들의 '선한 의도'가 불러온 무시무시한 나비 효과

심영구 기자 2023. 2. 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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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칼럼 해설] 문해력과 의도치 않은 결과에 관하여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이달 초, 짧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온 가족이 모인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카가 작별 선물이라며 저와 아내에게 종이를 한 장씩 건넸습니다. 제가 받아 든 종이에는 하트, 동그라미, 별표가 가득했고, 한가운데 삐뚤삐뚤하지만, 꾹꾹 눌러쓴 글씨로 "삼촌 사랑해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감격에 겨워 조카를 향해 눈에서 하트를 발사하려는 찰나에 옆에서 아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 ㅇㅇ야, 정말 고마워. 그런데 한 군데 글자 받침이 귀엽게도 틀렸네!"

아내가 받아 든 종이 한가운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숭모 사랑해요"
"발음은 숭모가 맞는데, 쓸 때는 ㅇ 대신 ㄱ 받침을 써야 해. '숙!' 모라고 쓰는 거야. 알겠지?"

조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숭'모가 쓸 때 너무 헷갈려요. 왜 말하는 거랑 쓰는 게 달라요?"

저도 곧바로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발음 규칙이 그렇다고 얼버무렸다가는 요즘 한창 한글 배우는 재미에 빠진 조카가 규칙이 정확히 뭐고, 왜 그런 규칙이 있냐고 물을 텐데, 그러면 대화는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질 테고, 아직 비비지도 못한 자장면이 팅팅 불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숙모의 'ㄱ'을 'ㅇ'으로 발음하는 건 자음동화 규칙 때문이라는 것도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가까스로 기억해냈습니다.)

"글쎄... 왜 그럴까? 일단 자장면부터 불기 전에 먹고 생각해 보자!"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미국 어린이 2/3가 글을 잘 못 읽는 원인과 해결책
[ https://premium.sbs.co.kr/article/Ujy1AyWHYj ]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닉 크리스토프가 미국 어린이 대다수가 글을 잘 읽지 못하는 문제를 꼬집은 칼럼 제목을 보고 지레짐작한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경제적 불평등입니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불평등은 사회의 모든 분야,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데, 교육이라고 예외일 수 없죠. 만 2세 아이들에게서도 부유한 집안 출신과 가난한 집안 출신 사이에 언어 능력이 최대 6개월씩 차이가 난다는 연구가 떠올랐습니다.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더니, 기어이 언어 능력을 제때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많아져서 자기 나라 말(영어)로 쓴 책도 잘 못 읽게 됐구나,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 https://empathyeducates.org/language-gap-between-rich-and-poor-children-begins-in-infancy-stanford-psychology/ ]

그렇다면 공교육의 실패가 원인일까요? 마찬가지로 경제적 불평등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은 특히 부유하지 않은 지역에서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정부 지원이 부족한 동네에서는 집에 인터넷이 없어서, 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가 없어서 온라인으로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못 하고 학업에서 뒤처진 끝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어려우므로,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죠. 이러한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 문제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쳤을 때 특히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크리스토프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디지털 격차 때문에 아이들이 글을 잘 못 읽는 문제를 지적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 https://usafacts.org/articles/internet-access-students-at-home/ ]

정치가 발목을 잡았다?

크리스토프가 지적한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파닉스(phonics)를 외면했다는 겁니다. 영어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들어보셨을 테지만, 파닉스는 글자마다 어떻게 소리 내야 하는지 발음을 먼저 가르치는 교육법입니다. 그런데 영어에서 쓰는 로마 알파벳도 한글처럼 어떻게 소리 나는지 음성 기호로 정리할 수 있을 테고, 그걸 가르치면 될 텐데 미국은 어쩌다 발음 교육을 등한시한 걸까요?

크리스토프의 설명을 빌리면, 정치적인 이유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즉, 공화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발음 교육을 강화해 아이들의 읽기 능력과 문해력을 높이자고 주장하자, 공화당에 반대하는 민주당 지지자와 진보 진영 사람들이 발음 교육 자체를 덮어놓고 반대했다는 겁니다. 이들은 한가하게 발음을 교정할 시간에 저소득층 학생이 많은 학교에서 더 효과적인 독서 교육을 시행할 수 있도록 선생님들을 훈련하고 더 많은 책을 보내주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가 보기에 발음부터 가르치는 쉽고 빠른 길을 내버려 두고 다른 것만 강조한 결과, 아이들은 제때 글을 떼지 못했고, 결국 읽기도 서툴러 올바른 독서 습관을 들이지 못한 아이로 자라나 문해력이 낮은 어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부시가 싫어도 그렇지, 4학년 학생의 2/3가 글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충격적인 결과는 사회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무시무시한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책결정자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늘 생각해야

크리스토프는 파닉스 말고 다른 걸 강조한 이들에게 다소간의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는 거죠. 저는 여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정책결정자라면, 또는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라면 의도가 얼마나 선한가를 두고 경쟁해선 안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경쟁하고 평가받아야 하는 기준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스프 독자분들께 아무래도 좀 더 익숙한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 역대 어느 정권도 부동산 정책이든 입시 제도를 포함한 교육 정책이든 일부러 망치려고 작정한 이는 없었을 겁니다. 어느 대통령이든, 어느 여당이든 의도와 목표는 늘 흠잡을 데 없을 만큼 훌륭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반드시 결과도 좋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모든 정책에는 의도치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형용모순이긴 하지만, 예기치 못한 결과까지 최대한 예상해 계획에 넣어 정책을 세워 추진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 책임지는 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자세입니다.

정치적인 진영 논리에 갇힌 두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 정답은 양극단의 중간쯤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의견 가운데 일리 있는 부분을 잘 섞어 정책을 짜는 건 요즘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세상에서는 용기 있는 일입니다. 크리스토프는 진보 진영의 편견을 버리고 발음 교육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독서 교육 전문가들을 인용하며, 어린이들의 읽기 능력을 높이고, 나아가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지금이라도 발음 교육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국어가 영어인 아이로 자라본 적이 없어서 판단하기 어렵긴 하지만, 저도 크리스토프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교육 정책이 바뀌었을 때 그 효과가 나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테니, 지금으로선 미국의 교육 정책을 짜는 이들이 어떻게 할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심영구 기자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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