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겨울

한겨레 2023. 2. 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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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지난해 9월5일 어르신들이 주야간보호센터에서 실시하는 퍼즐맞추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대구 효경복지공동체 제공

[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오후 4시면 밴드에 소식이 뜨고, 그날의 주요장면들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올라온다. 가벼운 체조와 목욕, 미술 활동과 단체 게임도 있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점심으로 뭐가 나왔는지도 알게 된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의 일상을 스마트폰으로 전해 볼 수 있게 된 건 노인주간보호센터에 나가신 재작년부터이다.

그전까지 얼마간 할아버지의 ‘일’은 투박하나마 할머니를 돌보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무엇보다도 할아버지의 ‘마음이 꺾여버릴까 봐’ 걱정이었는데, 밴드에선 일과가 무사히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사진 속 할아버지는 활짝 웃는 일은 없어도 검지와 중지를 펴서 ‘브이’를 만들어내었다. 산수 문제풀이처럼 어린이집 아이들이 할 법한 활동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치매예방’이라며 담담했다. 친구는 좀 사귀셨나 하니, ‘멀쩡’해 보여서 말을 걸면 딴소리를 하거나 갑자기 뛰쳐나가다 붙들려 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셨다.

센터에서 늘 ‘모범생’이던 할아버지가 지난 겨울을 앞두고 요양원행을 선언하였다. 할아버지는 아흔여섯. 40년 전 자식들과 함께 지은 벽돌집의 1층은 창고, 2층은 살림 공간인데, 수없이 오르내리셨을 계단이 난코스가 되어버렸다. 귀가 후엔 소주 한잔, 밤엔 수면제 반 알을 드시고 애써 잠을 청한다 했다. 어쩌다 사진에 안 보여 ‘빅 브러더’처럼 전화를 하면 할아버지는 ‘농땡이 부렸다’며 머쓱 웃으셨다. 일주일에 한 번 청소와 빨래 그리고 장보기를 해주시던 분이 그만둔 이후로 사람을 구할 수 없었고, 센터 쪽에서는 그래도 집에서 생활하시는 게 좋을 거라 하였으나, 여러모로 할아버지는 겨울이 자신 없다 하셨다.

나중에 듣기로, 센터에서 매달 수차례 일정이 잡히는 음악공연이 약간의 화근이었나 보다. 외부 강사를 초빙하여 북치고 노래하는 시간, 할아버지는 앰프로 증폭되는 음악 소리를 견딜 수 없었다. 귀가 아프고 심장이 뛰었다. 가요교실이 있는 날은 미리 결석이나 조퇴를 하여 요리조리 피하셨는데, 어느 날 그만 꼼짝없이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따로 작은 방에서 귀마개를 하고 누워 자동안마를 받다가 그래도 불편하면 버튼을 누르시라 안내받았으나, 귀마개는 소용없었고, 버튼을 눌러도 압도적인 소리에 묻혀 한참 응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불같이 화가 나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한바탕 소란을 벌이고 사과를 요구하셨다 한다.

‘나이듦’이란, 끝이 있기에 비로소 의미 있는 생의 일부인데, 우정과 연대로 구축되는 자발적 지역 공동체의 층위에 안착하지 못하고 개인/가족의 공간으로부터 국가/시장의 논리체계로 편입된다.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등을 저술한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비판처럼 삶의 중요한 영역들이 교육, 의료, 법률, 복지 등 각종 ‘전문가’ 집단에 종속되어 우리는 나다운 일상을 살아낼 촘촘한 힘과 지식 그리고 연결고리들을 잃는다. 주고받고, 사고파는 자본주의적 등가교환의 관계나 신자유주의적 신체와 같은 효율적인 관리, 경영, 전시의 대상화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양한 나이듦의 경험이 수동과 상실의 존재로 동질화되어 버리는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슬픔과 두려움을 떨치고 모두에게 찾아오는 나이듦의 과정을 환대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프랑스 영화 <아무르>에서 주인공은 인지증(치매)과 중풍으로 앓아누운 아내에게 어렸을 적 여름 캠프 이야기를 한다. 캠프에 가기 전 엄마와 약속을 했다, 캠프가 마음에 들면 엽서에다 꽃을, 아니면 별을 그려 보내기로. 소년들의 ‘무엇’을 꺾어놓으려 했는지, 엄격했던 캠프에서 그가 엄마에게 보낸 엽서는 별들로 가득했다. 요양원에 적응하시냐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멋쩍은 듯 ‘하루하루 넘긴다’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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