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진다는 의미는

한겨레 2023. 2.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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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사진 픽사베이

1.

하느님의 뜻이 내게서 이루어진다는 말의 뜻을 잠시 묵상해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삶의 여정, 기록 그리고 내면의 소통. 이 모두가 날마다 나의 삶 속에서 나를 통해 살아 움직이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과정 아닐까?

아내와의 대화

서로 다른 생각, 감정이 늘 교차하고 있기에 때론 다투기도 하고 감정의 흐름에 엇박자가 나기도 한다. 아내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아내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내에게 읽혀졌나 보다. 아내가 그런다. ‘나에게 기대려 하지 마세요. 나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사세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내를 통해 하느님께서 내게 귀한 깨우침을 전달해 주고 계심이다. 그리고 이어진 아내의 한마디. ‘같이 사는 사람으로 최소한 내게 전달해 줄 내용, 아내인 내가 궁금해할 내용을 미리 알려주려는 그 마음은 잊지 말기를요.’

그렇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와 함께 지내는 그 사람과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 그러면서 나 자신 깊은 곳에 계신 하느님과의 소통이 자유로운 상황을 때론 독립적으로, 때론 연결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삶 속에서 삶으로 드려지는 기도가 된다면 바로 그 지점이 하느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지는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귀하고 감사한 깨우침이다. 고맙다.

2.

카카오톡 프로필을 가을 단풍 사진과 함께 ‘말과 느낌, 기호와 추상. 너머의 끌어당김!’이라는 표현으로 적어 보았다. 말은 언어요, 때론 기호의 역할을 한다. 뜻을 담는데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느낌은 말과 다르다. 때론 추상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떤 신부님은 하나님과 소통하는데 ‘경험, 느낌, 말씀’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언급한다. 때론 느낌은 추상과도 맞닿아 있다. 이 모두는 경계 너머의 끌어당김과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한 끌어당김!

몇몇 학생들과 연주를 준비한다. 바이올린, 첼로, 드럼 그리고 테너 색소폰. 이 모두의 악기가 담아내는 선율을 편곡하며 구상하고 있는 학생이 물어온다. “선생님. 카카오톡 프로필에 ‘말과 느낌, 기호와 추상. 너머의 끌어당김’이라고 쓰셨던데 이게 어떤 의미인가요?” 위의 내용을 내 생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는, “신앙 생활한다고 했던가? 선생님은 끌어당김을 성령께서 하시는 작용이라고 생각한단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질문 던진 첫 학생과의 대화다. 교실에서는 수학으로, 교실 밖에서는 음악으로 자주 만나게 될 듯하다. 감사한 만남이다.

사진 픽사베이

3.

학교 출근. 집에서 묵상과 하루 시작의 시간을 갖고 학교에 도착. 수업 일정과 할 일을 체크하고 잠시 산책. 뒷산에 낙엽이 수북 쌓이고, 죽은 듯 고요한 틈 사이로 새줄기가 돋는다. 겉보기에는 죽은듯 보여지지만 새로운 모습을 준비하는 생명력을 잠시 들여다본다. 누가 이 생명력을 주었는가?

자연이라는 말로 담아낼 수도 있고 하느님이라고 담아낼 수도 있다. 조심스럽다. 언어는 그릇이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언어 너머의 느낌이랄까? 울림과 떨림이랄까? 감히 사람의 표현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그러하다. 같은 내용을 얘기하지만 전혀 엉뚱한 관념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지 않은가? 산책길에 보여진 나무의 모습 속에서 낙엽과 새로운 푸르름과 죽음과 삶의 약동을 동시에 본다. 감사하다.

4.

수업 시간. 나는 수업 시간을 예배자의 심정으로 준비하고 수업에 임한다. 20명의 서로 다른 학생들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이 먼저고, 그 다음은 학생들의 질문에 내가 답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다음이며, 학생들과 함께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라기보다 내가 알고 고백하는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개입하시고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주일에 예배하는 시간이 그런 시간 아닌가? 수업 시간이든 예배 시간이든 구분될 필요가 없다. 호기심을 따라가는 나는 그 공간과 시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에,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을 탐험하고 있기에 나 자신의 새로운 영역의 발견이며 창조적인 삶으로 바뀌고 있음을 체험하기에 그러하다. 매 순간이 나를 새로운 발견의 문턱으로 이끌고 있음을 경험한다.

기원전 3세기 경에 살았던 아르키메데스. 그 후로 1900여년 시간이 흐른 뒤 등장한 뉴턴.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를 인식했고, 끊임없는 호기심과 내적 울림의 작용을 그들만의 언어로 표현했고 기록했으며 관찰하여 배움의 한 줄기를 형성했다. 숫자가 갖는 한계를 기하라는 영역으로 접근했으며 세상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창조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수학을 가르치는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고 그들의 호기심이 지금의 교실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음을 느낀다.

바울 선생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2000여년 가까운 지금에도 나의 호기심과 궁금함을 자극하는 것도 아르키메데스나 뉴턴에게 일어났던 사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살아 숨쉬며 지금의 바로 여기에 나와 대화를 요청하고 있고 그 대화에 반응하며 나 자신의 깊은 사고의 영역에 맞닿아 있기에 그러하다.

수업과 예배. 다른 듯 다르지 않은 나만의 하느님 만나기이다. 감사하다.

글 박진호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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