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백신 R&D 재정비 나선 일본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박근태 기자 2023. 2. 19.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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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들면서 바이러스에 변이가 일어나도 효과를 유지하는 차세대 범용 백신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온텍은 이미 일찌감치 범용 백신의 임상 시험이 착수했고 코로나19 사태 때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각국 후발 주자들도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선 뒤늦게 첫 코로나19 백신이 승인을 앞두고 있다. 일본 제약사 다이이찌산쿄가 개발 중인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반 백신이다. 그 뒤를 이어 일본 제약사 시오노기가 개발한 재조합 단백질(단백질 아단위) 백신과 KM바이올로직스가 개발한 불활성 백신도 승인을 앞두고 있다.

일본 정부는 여기에 더해 지난해부터 새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100일 만에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1조1000억엔(10조원)을 쏟아붓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뒤늦게 백신 능력 확보에 속도를 높이는 이유는 뭘까. 얼마 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실렸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일본의 백신 연구개발 능력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했다. 일본은 코로나19 사태 동안 백신은커녕 변변한 치료제 개발마저 늦어지면서 자존심에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25명이나 배출한 ‘아시아의 과학강국’ 일본이 코로나19 시기 백신을 하나도 내놓지 못했다는 새삼 놀라운 일이다.

일본 백신 역량의 쇠퇴는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딜로이트 토마츠 컨설팅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전염병 연구 지출은 15~20년간 점점 줄어 2021년에는 미국의 2% 수준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의학 연구를 선도하는 영국과 독일은 물론 중국보다도 훨씬 적은 투자 규모다. 이 같은 투자 축소는 백신 연구계가 최소한의 전문가 풀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학계 수혈될 젊은 인재 유입도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 과학계는 백신 역량의 판도를 바꿀 기회도 잃었다. 일본 국립생물의학혁신연구소 연구진은 당시 유행하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백신을 당시 막떠오르던 mRNA기술로 개발하려고 했다. 암 치료에 활용될 것으로 예상되던 mRNA 기술은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첫 정식 허가를 받고 가장 많은 국가에서 접종된 백신에 활용됐다. 기존 바이러스벡터나 재조합 단백질 백신보다 범용으로 활용될 수 있어 향후 다양한 분야에 활용 가능성이 큰 유망 기술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선점할 수 있었던 이 기술은, 정부와 제약사들의 임상 시험에 대한 지원 거부로 확보하지 못했다. 아사히신문은 2021년 일본 백신의 잃어버린 20년을 분석하면서 1970년대 백신 소송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출산율 감소로 백신 시장이 줄어들면서 제약사들의 개발 의지가 꺾인 것이 복합된 결과라는 분석을 실었다.

이 같은 상황은 결국 일본이 코로나19 백신 연구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영국 왕립학회가 발행하는 오픈사이언스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발발 이후 2021년 8월까지 백신 개발과 방역 초기 단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을 발표한 상위 과학자 300명 가운데 일본인은 단 두 명에 머물렀다. 미국이 67명, 중국은 52명, 인도 32명, 이탈리아 18명, 홍콩 14명, 인도가 12명인 것과 비교해 크게 밀리는 수치다.

일본 정부가 최근 백신 능력 확보에 적극 나선 것은 심각하고 근원적인 불안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관료들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자국민을 위해 대량으로 백신 비축에 들어가자 “자칫 국민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걱정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결국 지난해 3월 다가올 각종 감염병에 대비해 백신 연구의 리더십을 뒷받침할 첨단연구개발전략센터(SCARDA)를 출범시키는 한편 여러 대학과 연구자에 대한 지원 확대를 통해 생태계를 전면 개편하는 방안을 내놨다. 백신 관련 스타트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27억 달러를 편성하고 대규모 임상시험을 지원하는 20억 달러 규모 예산도 편성했다.

물론 일본의 백신 이니셔티브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일본의 고질적인 관료주의와 도전이 사라진 사회 분위기가 백신 투자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2027년 3월에 첫 투자가 끝난 뒤 후속으로 자금 지원을 지속할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일본 내 대학원 진학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더 많은 젊은 인재를 유입시키는 것도 숙제다.

하지만 일본의 이런 움직임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코로나19 동안 방역 선진국이라는 평가와 함께 백신 한 종을 어렵게 확보했지만 mRNA과 같은 핵심 기술 확보에는 실패했다. 세계적인 영향력 300명 안에 든 연구자도 일본처럼 2명밖에 없다. 인구 100만 명당 감염자가 9번째로 많아질 정도로 사례가 많지만 이를 활용한 과학적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다. 연구개발(R&D) 투자액이 연간 100조원 규모,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으로는 세계 2위 국가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다. 초기 백신 연구에 착수한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가 개발을 포기했고 상황이 잦아들면서 백신 기술 확보에 대한 의지가 꺾이고 있는 우리와 비교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일본의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정부도 새로운 감염병 출현에 대비해 mRNA 백신 플랫폼 구축과 항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R&D)을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을 통해 분명하고 명시적 지원을 약속한 인공지능(AI)과 차세대 반도체, 양자에 비해 백신 경쟁력 확보에 대한 의지는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를 교훈 삼아 백신 개발과 감염병 대응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하는 의사를 양성하겠다며 제시된 의사과학자 양성의 필요성도 의사 정원 확대와 공공 의대 설립 등 또 다른 보건 이슈와 엮이면서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해외 과학자들이 일본 정부의 백신 이니셔티브에 대해 늦은 감이 있지만 야심 차며 확실히 환영할만한 조치라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 의식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스와 메르스에 이어 다시 3년 간 코로나19를 겪었지만 한국 사회는 또다시 망각의 강을 건너려 하는 건 아닌가. 제2, 제3의 코로나는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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