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암, 딸 이혼, 아들 퇴사까지…‘모두 내 탓’이란 엄마

한겨레 2023. 2. 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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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우울한 날이 더 많은 ‘기분부전증’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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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숙씨는 50대 여성으로 남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한달 전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초기에 암이 발견되어 대장의 일부만 절제하고 항문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민숙씨는 남편이 대장암에 걸린 게 자신이 남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배를 아파할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남편이 정기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갈 때면 며칠 전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노심초사합니다. 민숙씨의 남편은 집에서 주로 누워 있고 활동도 거의 없습니다. 남편의 병이 그다지 심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민숙씨가 모든 것을 챙겨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누가 잘못해도 ‘내 탓이오’

그러던 중 큰딸이 결혼 1년 만에 이혼을 해서 집으로 짐을 싸서 들어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딸에게 사위와 재결합하라고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딸만 보면 ‘네 인생 망쳤다’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딸이 이혼하게 된 것도 남편 간병을 하느라 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 탓이라고 가슴을 쳤습니다.

이런 중에 아들인 둘째가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생겼습니다. 민숙씨는 멀쩡하게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레스토랑을 운영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러질 뻔했습니다. 항상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숙씨는 아들에게 사표를 철회하라고 말렸지만 아들은 이미 가게를 운영할 장소를 계약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민숙씨는 남편도 자식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이런 소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그 뒤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됐고 친구들이나 친척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남편 병간호와 다 큰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식사를 챙기느라 이전보다 더 힘이 들었습니다. 생활비도 더 많이 들어서 경제적으로 점점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민숙씨는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민숙씨는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해했고 가족들이 화를 내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가족들은 민숙씨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민숙씨가 얼마나 우울하고 불안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민숙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우울의 터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평생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반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자신과 아버지는 입원 치료 후에 살았지만, 조수석에 타고 있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민숙씨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또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자라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큰딸이었던 민숙씨는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동생들을 챙기고 아버지 식사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공부를 잘했지만 남동생을 위해 대학에 가는 것 또한 포기했습니다. 옷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번 돈을 가지고 동생들의 학비를 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잘 성장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민숙씨는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오랜 기간 동안 우울감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를 정신의학에서는 ‘기분부전증’이라고 합니다. 기분부전증은 최소 2년 이상 하루의 대부분 우울한 기분을 가지며 우울한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은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민숙씨는 기분부전증과 함께 상실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숨지면서 어머니 역할을 해왔고, 가족들이 어머니처럼 없어지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오랜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숙씨는 어머니의 사망에 책임이 없고 오히려 사고의 피해자입니다.

민숙씨는 이제는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의 병도, 딸의 이혼도, 아들이 직장을 그만둔 것도 민숙씨의 탓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고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책임은 그들의 몫입니다. 민숙씨의 지나친 책임감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부터 굳어진 근본적인 죄책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민숙씨가 가족들의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가족들은 민숙씨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됩니다. 가족들은 민숙씨와는 반대로 민숙씨에게 의지하면서 그만큼 마음이 편해집니다.

엄마의 정신적 고통, 가족들이 도와야

민숙씨는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민숙씨의 인생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쪽이었지만 앞으로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자식들은 이제 민숙씨 옆에서 도움을 받지 않고 집에서 분리·독립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병을 스스로 관리하고 환자라는 역할에만 빠져들지 말아야 합니다.

대장암 못지않은 고통을 주는 민숙씨의 기분부전증이 얼마니 힘든지 이해하고 치료에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결국 민숙씨는 치료 후에 이전보다 우울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도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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