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9] 그는 가장 위대한 뱃사람이었습니다. 유럽 최강의 빌런, 나폴레옹에 맞서 조국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포탄을 맞고 한 쪽 눈을 잃었고, 팔이 잘려 나간 상황에서도 그는 갑판을 떠나지 않았지요. 총탄을 맞은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신이시여, 저는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애국자이자, 바다 사나이였습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영국에서 존경받는 호레이쇼 넬슨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 역시 군인이었습니다. 상관의 집에 방문했다가, 부인을 보고 한눈에 반했지요. “포기를 모르는” 군인정신이 빛(?)을 발합니다. 불륜에 빠져들었고, 아기까지 가지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사랑의 행각은 상관이 버젓이 눈 뜨고 있는 집에서도 이뤄졌지요. 이 전설적(?) 행각을 벌인 이의 이름 역시 호레이쇼 넬슨. 영국의 영웅이자, 세기의 불륜의 주인공입니다.
호레이쇼 넬슨과 엠마의 운명적 만남
세기의 불륜의 시작점으로 떠나봅니다. 1793년 9월 12일 이탈리아 나폴리가 배경입니다. 해군 호레이쇼 넬슨이 이 땅에 발을 디딥니다. 영국 해군에 입대할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지중해의 안보가 위협받는 시기였습니다. 영국으로서는 지중해를 프랑스 혁명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원군이 절실했지요.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이자 전직 상사였던 윌리엄 해밀턴이 넬슨의 조력자였습니다. 나폴리 왕실에 영국을 지원해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죠. 마침 나폴리 왕국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마리아 카롤리나는 프랑스 혁명의 파고를 막아야 할 명분이 확실했습니다. 루이 16세의 부인이자,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의 막내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넬슨과 엠마 해밀턴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집니다. 엠마는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으로 이미 나폴리 왕가를 비롯한 상류계층의 ‘스타’였지요. 스타는 스타를 알아보는 법일까요. 미국 독립전쟁 참전을 시작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넬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습니다. 다만 이 두사람에겐 각자 엄연히 배우자라는 장벽이 있었지요. 5일이라는 넬슨의 짧은 체류 기간도 사랑의 불꽃을 피우기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넬슨은 2000명의 지원군과 여러 척의 선박을 나폴리 왕실로부터 얻어냅니다. 닷새 후 전장에 나가 성 빈센트 곶 해전(1797년), 카디스 타격, 산타 크루즈 데 테네리페 해전에서 승전보를 전합니다.
특히 나폴리에서는 넬슨이 이집트 나일강에서 프랑스군을 꺾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곧 프랑스가 나폴리를 침략할 것이란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승리는 곧 나폴리의 것과 다름 없었지요. 윌리엄 해밀턴과 엠마도 크게 기뻐할 소식이었죠. 감격에 겨운 엠마가 넬슨에게 전한 편지는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집니다.
“이처럼 완벽하고, 영광스러운 소식은 없을 거예요. 승리자 넬슨과 함께 이 땅에서 호흡한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남편 윌리엄 경과 저는 당신을 껴안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영웅의 귀환…그러나 그 몰골은 처참했다
넬슨이 나폴리로 돌아온 건 1798년이었습니다. 잇단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전 유럽의 영웅이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그의 몰골은 처참했습니다. 1794년 코르시카 섬에서의 전투로 오른쪽 눈을, 3년 뒤인 1797년 스페인 테네리페에서 작전을 펼치다 팔 한쪽을 잃은 몸이었습니다.
성치 않은 몸이지만, 나폴리는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습니다. 페르디난트4세가 항구에서 그를 직접 의전했고, 윌리엄 해밀턴 경은 그를 집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엠마 역시 그를 극진히 간호하는 데 도움을 줬죠. 평소 존경해 마지 않던 영웅을 눈 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엠마는 가슴이 떨렸을 겁니다.
남편의 묵인 아래 시작된 노골적 불륜
“내 아내와 연애를 해도 나는 상관 없네.”
상식 밖 행동이 이때부터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엠마가 넬슨에게 연정을 품고, 점점 농도 짙은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남편인 윌리엄 해밀턴이 이를 용인하는 겁니다. “감히 내 아내를 네놈이”라는 격정의 사자후를 토해낼 법도 한데, 윌리엄 해밀턴은 넬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셋이서 함께 산책하고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들 세사람은 스스로를 라틴어 “Tria juncto in uno”라고 불렀는데요. 우리말로 ‘하나로 뭉친 셋’이라는 뜻이었죠. 그리고 2년이 채 안된, 1801년 1월. 엠마가 딸 아이를 출산합니다. 이름은 ‘호레이샤’. 누구의 딸인지 짐작하시겠지요. 여성에게는 거의 쓰지 않던 이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호레이쇼 넬슨의 자식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윌리엄 해밀턴은 이를 축복해 줬습니다. (세상에 이런 호구가 있을까요.)
이들의 삼각관계는 언론의 화제를 모았습니다. 우리로 치면, 고위 외교 대사 부인이 파견 나온 육군 장교의 아이를 낳은 희대의 스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롱섞인 보도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호구라 불리운 사나이...윌리엄 해밀턴은 왜 불륜을 용인했을까
여기서 잠깐 윌리엄 해밀턴(이라 쓰고 호구라 읽는다)의 정신구조를 분석해봐야겠습니다. 그는 왜 넬슨과 엠마의 불륜을 용인했을까요. 윌리엄 해밀턴과 엠마의 결혼 그 자체도 정상적으로 시작되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엠마의 삶에서도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딸이었습니다. 영국 체셔 네스턴 지방에서 아버지 없이 자라다 런던으로 홀로 상경해 하녀, 배우, 누드 댄서와 성매매까지 섭렵했지요. 타고난 외모와 예술적 재능을 겸비한 덕분에 그는 상류계층의 눈에 띄었습니다. 여러 유명인사들의 정부(情婦)가 되었지요. 그 중 한 명이 찰스 프란시스 그레빌이었습니다.
그레빌은 엠마의 외모에 빠졌지만, 진지한 연애대상으로 생각치는 않았습니다. 신분도 비천한 데다가, 돈도 별로 없는 여성을 부인으로 데려갈 순 없었거든요. 엠마의 생각은 달랐다는 게 문제였지요. 그는 그레빌을 제법 진지한 연인으로 여겼습니다. 사랑의 온도차는 언제나 비극을 낳지요. 그레빌이 돈 많은 가문의 여성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엠마를 처리할 묘안을 고안합니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 엠마 해밀턴의 비운
“엠마, 잠깐 나폴리에서 바람 좀 쐬고 올래?”
그레빌은 돈 많은 귀족인 외삼촌에게 엠마를 넘기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이름은 주 나폴리 영국대사 윌리엄 해밀턴. 마침 부인과 사별하고 나폴리에서 적적한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겐 솔깃한 제안이었죠. 엠마는 처음에 바람만 잠깐 쐬다 오는 여행인 줄 알았습니다. 6개월 후, 그는 깨닫습니다. 그레빌이 외삼촌에게 자신을 떠넘겼다는 걸.
1786년 크리스마스. 엠마는 윌리엄 해밀턴의 정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 엠마의 나이 21세. 윌리엄 해밀턴의 나이 56세였습니다. 5년 간의 생활 끝에, 윌리엄 해밀턴은 엠마와의 공식적인 결혼을 결심했죠. 나폴리 생활이 만족스러웠고, 해밀턴 또한 “최고의 남편이자 친구”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엠마는 이제 공식적으로 ‘레이디 해밀턴’이라 불리게 됩니다.
다시, 엠마와 넬슨의 로맨스로 돌아갑니다. 윌리엄 해밀턴은 엠마가 넬슨과 사랑을 하는 데 어떤 불편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왕실 후계자였던 웨일즈 왕자(후에 조지 4세)가 엠마에게 눈독을 들이자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힌 넬슨(본인도 불륜남인데?)에게 해밀턴 경이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엠마는 넬슨 자네에 대한 충절을 잘 지키고 있네.”
마치 장인어른이 사위를 달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35살이라는 나이차이로 엠마를 딸처럼 느꼈기 때문일까요, 성에 관대한 그의 태도가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요. 조카의 애인과 결혼하고, 그 아내의 불륜까지 용인하면서 불륜남까지 달래주는 이 태도. 할리우드 사랑법의 원조격이라고 해야할까요.
죽는 순간까지도 영웅은 불륜녀를 챙겼다
“제가 죽더라도, 엠마와 호레이샤를 돌봐주십시오.”
희대의 삼각관계에도 끝이 보였습니다. 세 사람이 런던에서 함께 거주하던 1803년이었습니다. 남편 윌리엄 해밀턴이 그해 4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에 다시 전운이 감돈 때였지요. 넬슨이 역시 바다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역사가 기록하듯이 2년 후인 1805년 트라팔가 전투에서 그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방향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역사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는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를 부각하지만, 넬슨은 죽는 순간까지 “엠마에게 재산을 주고, 호레이샤가 넬슨 성을 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당부를 남겼지요.
유언은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넬슨의 장례식에는 런던 시민 수천명이 집결합니다. 엠마는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유산도 아주 적은 돈만 받을 수 있었지요. 엠마와 넬슨이 함께 살았던 머튼 영지를 유지하기엔 매우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남편 해밀턴 가문에서 상속도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윌리엄 해밀턴이 죽고 나서 유산 관리인이 선정되는데, 그 사람이 그레빌이었기 때문입니다. 엠마의 전 애인이자 해밀턴의 조카였지요. 그는 엠마에게 제대로 유산이 상속될 수 있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엠마의 삶...끝은 허망 그 자체였다
정신적 ‘기둥’이 사라지자, 엠마는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뭇 남성들의 정부가 됐고, 파티에도 빠지지 않았지요. 외모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은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하고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넬슨의 유물을 경매로 내놓기에 이르지요. 출소 이후에는 빚쟁이들을 피해 프랑스 칼레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넬슨과 함께한 그 장소에 그는 다시는 갈 수 없었지요.
그리고 1815년 1월. 그가 넬슨과 해밀턴의 곁으로 가게 됩니다.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넬슨의 이름 뒤에는 항상 엠마 이야기가 따라 붙습니다. 그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인 셈이었습니다. 넬슨의 영웅담 뒤로, 세기의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이 붙은 배경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도 비정상적인 사랑이지만, 그 사랑 덕분에 세상 모든 이야기꾼들에 영감을 줬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색합니다. 영웅과 성인일지라도 너저분한 티끌이 있음을요.(이순신 장군은 예외입니다.)
<네줄 요약>
ㅇ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은 나폴레옹의 야욕을 막은 국민 영웅이다. 영국판 이순신인 셈이다.
ㅇ그는 해전에서의 성과만큼 상사였던 윌리엄 해밀턴의 부인 엠마와의 염문으로 유명했다.
ㅇ윌리엄 해밀턴은 엠마가 넬슨의 아이를 가졌음에도, 이를 용인하고 응원해주는 호구였다.
ㅇ모든 영웅에게도 흠결은 있다. 예외는 오직 이순신 장군.
<참고 문헌>
ㅇ박지향, 클래식 영국사, 김영사, 2012년
ㅇ앤드루 램버트, 넬슨-대영제국을 구한 바다의 신, 생각의나무, 2005년
ㅇ케이트 윌리엄스, England‘s Mistress: The Infamous Life of Emma Hamilton, Ballantine Books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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