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로 성공한 여성 ‘홍색 자본가’의 실종...남편의 선택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3. 2.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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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6회>

<“레드 룰렛”을 통해 부패하고 타락한 중국 홍색 귀족층을 비판한 선둥의 모습. 사진/Tom Pilston/FT>

1992년에서 1997년 사이 중국의 경제 규모는 두 배나 급증했고, 1997년부터 2004년 사이 다시 그 두 배가 되었다. 노다지를 캐서 누더기를 벗어 던지는 벼락출세의 성공담이 날마다 들려왔다. 바야흐로 대자본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급기야 2002년 중국공산당 장정(章程)이 수정되어 민간 기업가들도 공산당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4년 중국 헌법 수정안 제22조는 “공민의 합법적 사유재산은 침범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명시했다. 이로써 민간 기업가와 중국공산당 사이의 정략결혼이 시작되었다. 자본가가 진정 공산당원이 될 수 있을까? 공산당이 과연 자본가를 포용할 수 있을까? 공산당에 들어간 자본가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자본가를 끌어안은 공산당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이었나?

‘공산당 귀족’의 부패와 비리 폭로한 ‘홍색자본가’ 선둥

선둥(沈棟, Desmond Shum, 1968- )은 2021년 9월 뉴욕에서 <<레드 룰렛: 오늘날 중국의 부, 권력, 부패, 보복에 관한 인사이더의 이야기>>를 출판했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홍색 귀족층의 부패와 비리를 심층적으로 파헤친 이 책은 출판 즉시 서방 유수 언론들에 대서특필되었다. 190cm가 넘는 장신의 이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 사내는 2000년대 베이징에서 건설 붐과 투자 열풍을 타고 억만장자로 성장한 “홍색 자본가”였다. 그는 또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이하 정협)의 대표로 10년간 복무했다. 한때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홍색 기업가의 꿈을 맘껏 펼쳤던 이 사내는 현재 영국 런던에 체류하며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홍색 귀족층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고 있다.

<2004년 5월 8일 선둥과 두안웨이훙. 사진/Courtesy of Desmond Shum>

선둥은 문화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1968년 상하이에서 “계급 천민(賤民)”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번창했던 그의 조부는 해외로 탈출하는 대신 “계급연대”를 외치는 중국공산당의 선전을 믿고 중국에 머물렀다가 전 재산을 압류당한 채 “인민의 적”으로 몰려 정치 집회에서 처형당했다. 1950-60년대 이른바 흑오류(黑五類)의 집안에서 나고 자라며 갖은 차별과 탄압에 시달렸던 그의 부친은 울분과 원망에 휩싸인 채로 음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어린 시절 선둥은 부친에게 늘 매질을 당하면서 자랐다.

1978년 개혁개방의 물꼬가 터진 후 그의 집안은 갖은 노력 끝에 중국의 국경을 통과해서 홍콩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홍콩에서 사춘기를 보낸 선둥은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경영학 전공으로 학부를 마치고 1990년대 중반 다시 홍콩으로 복귀했다. 선둥은 홍콩의 한 금융회사에 수년간 경력을 쌓아서 1997년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홍콩서 자라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선둥은 빠르게 바뀌며 급히 성장하는 중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며 기회를 엿보는 방외인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 사회를 촘촘히 엮고 있는 당·정·관·군·민의 인적 “관시(關係)”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베이징에서 유능한 여성 사업가 두안웨이훙(段偉紅, 1968- Whitney Duan)을 만나 서로 연인이 되면서야 선둥은 비로소 중국 사회를 지배하는 중국공산당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국가자본주의를 비꼬는 풍자만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여기는 희망과 기회의 땅이다!” 그림/IWL-FI>

벤처 사업 통해 신흥 재벌로 성장한 두안웨이훙과 결혼

산둥의 빈한(貧寒)한 집안에서 태어나 군대가 운영하는 “난징 기술·직업 학원”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두안웨이훙은 졸업 후 대학 공산당에 입당했고, 곧 총장의 비서가 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총장의 소개로 두안웨이훙은 산둥성의 한 현(縣)에서 외자 유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발랄한 성격에 사교성이 뛰어난 두안웨이훙은 군대의 이권 사업을 관리하며 사업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996년 톈진에서 독자적으로 벤처 사업을 시작해서 2000년대부터 유능한 기업가로서 승승장구의 가도를 달렸다. 카이펑(凱風) 공익 기금회, 타이훙(泰鴻) 투자 그룹, 중국 핑안(平安) 보험 주식회사, 항강(航港) 발전 유한공사 등의 회사를 직접 경영하며 그는 신흥 재벌로 성장했다.

<1990년대 말, 톈안먼 광장에 선 두안웨이훙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곧 결혼한 두 사람은 2000년대를 거치면서 베이징 공항 개발, 최고급 호텔 건설 등등 대규모의 사업을 착착 수주해서 명실공히 대재벌로 성장했다. 특히 두안웨이훙은 원자바오(溫家寶, 1942- ) 국무원 총리의 부인인 장페이리(張培莉, 1941- )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핵심 권력층에 다가갈 수 있었다. 덕분에 선둥은 중공 중앙의 권력자와 혁명원로의 후예들로 구성된 이른바 “홍색 귀족”과 홍색 자본가들이 어울려서 벌인 “레드 룰렛” 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원자바오 총리(오른쪽)와 그의 부인 장페이리 (왼쪽). 사진/SMP>

선둥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소수 특권층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치조직일 뿐이다. 혁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붉은 귀족은 개혁개방의 봇물이 터진 1980-90년대 이미 갖은 이권을 챙기고 정치적 “관시(關係)”를 팔아서 큰 몫의 재산을 거머쥔 중국 최상위에 앉아 있는 극소수의 특권층이다. 중공 영도층의 후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종(種)을 이루고 있다. 먹는 음식, 입는 옷, 다니는 학교, 진찰받는 병원, 모이는 장소 등등 모든 면에서 그들은 차원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운전기사가 모는 리무진을 타고 다닌다. 그들은 정치권력의 지분을 팔아서 막대한 재산을 일군다.

일례로 선둥은 친하게 지냈던 구무(谷牧, 1914-2009)의 손자 류스라이를 꼽는다. 1975-1982년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한 구무는 덩샤오핑과 함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 핵심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후광을 받으며 류스라이는 정치적 관시를 팔아 치부했다. 그는 디스코텍에 소방 관련 인가를 내주거나 성형외과 시술소에 의료 허가증을 발급하면서 뒷돈을 챙겼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폴로 대회에 참가했다. 타일랜드 폴로 대회에선 우승했고, 베이징에서는 직접 토너먼트를 열었다.

또 선둥과 친했던 홍색 귀족 중엔 볼프강이라 불리던 친구가 있었다. 그의 조부 역시 1930-40년대 중국공산당 최고 영도자 중 한 명이었는데, 1950년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한 이후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나서 고초를 겪었다. 덩샤오핑의 발탁으로 복권된 개혁개방 이후 그의 아들은 곧 정부 사업을 수주받으며 거부가 되었다. 볼프강 역시 최고의 엘리트 초등학교에 다녔다. 10대에 미국으로 가서 대학 졸업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볼프강은 부친의 사업을 이어서 재산을 불렸다. 이 집안은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팔릴 때나 상하이에서 수백만 달러 맨션이 매매될 때 등 거의 모든 거래에서 소정의 지분을 챙기는 홍색 귀족이었다.

뉴욕타임스의 폭로, 원자바오 가족의 검은 자금

2012년 10월 25일 뉴욕타임스는 원자바오 총리의 친인척이 미화로 총 27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쥐고 있다는 특종기사를 내보냈다. 특히 90세 노모의 명의로 중국의 한 투자 금융사에서만 1억 20만달러나 투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원자바오 총리의 아들, 딸, 동생, 처남 등 온 집안 식구들도 한몫씩 큰 재산을 확보하고 있었다. 실소유주의 실명을 감추기 위해 명의를 친구, 동료, 동업자로 돌려놓았지만, 기자들의 취재로 정부와 민간 기업이 결탁한 부패의 연결고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국공산당 규정은 당정 간부들의 직계가족의 재산 공개를 요구하지만, 친인척의 사업 체결이나 투자 행위를 규제하지는 않는다. 당정 간부가 친인척의 명의를 빌려서 얼마든지 치부할 수가 있도록 법망에 큰 구멍을 뚫어놓은 격이었다.

2007년 1억 2천만 달러를 원자바오 모친의 명의로 투자한 주체는 원자바오의 고향 톈진에 등록된 타이훙(泰鴻) 공사였다. 타이훙 공사는 바로 두안웨이훙 소유의 지주회사였다. 형식상 원자바오의 모친과 친척들의 명의로 핑안(平安) 증권에 투자되었지만, 실제 투자자는 바로 타이훙 공사의 두안웨이훙으로 밝혀졌다. 기자의 송곳 질문에 두안웨이훙은 자신의 지분 규모를 감추기 위해 타인의 명의를 빌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자기 친척들에게 명의를 빌려줄 사람들을 찾아보라 했는데, 우연히도 원자바오 총리의 가족들의 명의가 주주로 등록됐다는 황당무계한 변명이었다.

<두안웨이훙의 모습. 날짜 미상. 사진/공공부문>

<<레드 룰렛>>에서 선둥은 두안웨이훙과 원자바오의 부인 장페이리의 긴밀하고도 돈독한 관계를 소상하게 밝힌다. 당시 장페이리가 중국의 보석 무역을 쥐락펴락하는 거부라는 점은 중국 상층부에선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두안웨이훙은 그 집안의 모든 경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과 관련된 작은 일들까지도 챙겨주고 돌봐 주는 집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두안은 중공 중앙 최고위층과의 관시를 얻었다.

뉴욕타임스 특종이 보도된 후 원자바오는 이례적으로 변호인을 선임해서 공식적으로 기사 내용을 거짓이라 주장했다. 원자바오의 모친 명의 재산을 모두 부정했는데, 묘하게도 온 가족이 통틀어 27억 달러 자산을 운용한다는 점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했다. 몇 달 후 원자바오는 예정된 그대로 퇴임했고, 뉴욕타임스 탐사 기사는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두안웨이훙의 실종과 선둥의 폭로

2017년 9월 5일 두안웨이훙은 베이징에서 사라졌다. 실종 하루 전 두안은 선둥과 함께 지은 25억 달러 가치의 “제네시스 베이징” 빌딩 사무실에 출근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서 두안의 행방을 두고 수많은 추측이 나돌았다.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한 명은 중국공산당 당국이 두안의 몸에 약물을 투입하고 구타했을 것이며, 살아온다 해도 좀비 상태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중공 정부는 두안의 실종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주위에선 두안의 실종이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했던 쑨정차이(孫政才, 1963- )와 연관이 있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2017년까지 승승장구하던 쑨정차이는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 1955- )의 후임으로 예상되던 권력자였는데, 그해 7월 갑자기 충칭 당서기의 직위를 잃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 공항을 증축할 때 두안웨이훙과 선둥은 공항 개발 이권을 따냈는데, 그 당시 쑨정차이는 바로 그 공항 부지가 위치한 현에서 최고위 간부였다. 그 때문에 두안의 실종이 쑨정차이의 파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안웨이훙은 평소 “무덤에서 내 시신을 꺼내 채찍질해도 먼지 한 터럭 나오지 않으리라”고 말하곤 했다. 구체적인 부패 혐의를 찾지 못해서일까? 두안은 5년 넘는 세월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 있다. 전처가 사라진 후 선둥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버렸다.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강하게 중국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했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람을 잡아가는 중국의 체제는 과연 어떻게 정당한가? 1997년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경찰은 피의자를 37일까지 구금할 수 있다. 그 후엔 풀어주거나 구속해야 한다. 우스운 일이다. 두안웨이훙은 아무 소식 없이 최장 시간 감금된 포로가 되어버렸다.”

놀랍게도 책을 출판하기 직전 선둥은 갑자기 두안웨이훙의 전화를 받았다. 두안은 선둥에게 “제발 책을 출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선둥은 그 배후에 중국공산당이 있음을 직감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정당한 투쟁의 길을 택했다. 그는 계획대로 <<레드 룰렛>>을 출판했다. 책의 결론에서 그는 말한다.

“나와 나의 전처 두안웨이훙 같은 기업가들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밀월은 적을 분열시켜서 분쇄하려는 볼셰비키 혁명에서 생겨난 레닌주의 전술일 뿐이었다. 당과 기업가들 사이의 연대는 일시적이었다. 당의 목적은 전면적 사회 통제였다. 더 이상 경제 건설, 해외 투자, 홍콩의 자유 억압 등의 목적에서 우리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적이 되었다.”

<2022년 11월 말 상하이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 병력이 거리를 봉쇄하고 있다. 사진/nzz.ch>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선둥은 선언한다.

“나는 깨달았다. 부와 직업적 성공보다 기본적 존엄과 인권이 삶의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나는 이제 그 이상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중국 대신 서방 세계를 택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아들을 위해서.”

선둥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은 민간 기업가를 당원으로 만들거나 당원으로 민간 기업가로 키워서 큰 사업을 벌이게 했고, 충분한 재원을 마련되자 초개처럼 그들을 버렸다. 재주는 민간 자본가가 넘었는데, 돈은 중국공산당의 챙긴 격이었다. 시진핑 정권은 출범과 더불어 “시장의 시대”는 가고, 10년 넘게 “국가의 반격”이 현재 진행 중이다. 붉은 귀족의 룰렛 판은 여전히 돌아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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