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당(黨)과 대통령 사이

천남수 2023. 2. 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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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11월 16일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 공군 1호기에서 내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 등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총재는 과거 유력 정치인을 중심으로 정당이 꾸려지던 시절에 있었던 직함이다. 물론 요즘 정당에서 당총재라는 자리는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현직 대통령을 집권 여당의 명예 당대표로 추대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과정에서 ‘윤심 논란’이 불거진 데 이어 이번에는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문제’로 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비교적 ‘당정 분리’ 원칙을 지켜왔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래서 당총재 얘기를 소환했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등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이른 가운데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에 대한 국회의원직 제명 처리가 있었다.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지 인터뷰 내용을 문제삼아 여당인 공화당과 대통령이 임명했던 유정회 의원들이 김영삼 의원의 제명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킨 것이다. 당시 야당은 김영삼 총재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여 투쟁을 벌여왔던 터라 이것을 제압하려는 독재정권의 무모한 시도였다.

야당의 중심인 김 총재의 제명은 그의 본거지인 부산 시민들의 저항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부산에서 시작됐지만, 급기야 마산까지 번지면서 사태는 악화됐다. 이에 정부는 부산과 경남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000여 명을 연행했다. 계엄령은 군의 출동을 의미했다. 3공수여단이 출동해 500여 명의 시민을 연행하면서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시위는 확산됐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태가 벌어지면서 박정희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김영삼 총재 제명 사건으로부터 10년 후인 1989년 검찰은 평민당 소속 의원이었던 서경원 의원 밀입국 사건과 관련해 김대중 당 총재를 소환 조사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라 당시로서는 제1야당 총재를 소환조사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총재가 검찰 소환에 불응하자 평민당사에서 강제 구인해 15시간 동안 조사했다. 서 의원이 입북보고를 했는지와 북한으로부터 받은 5만 달러 중 일부를 김 총재에게 전달했는지 등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제1당 총재를 강제 구인한 초유의 사건이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야당 총재에 대한 검찰조사는 1990년 2월 전격적으로 이뤄진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해석됐다.
 

▲ 지난 2018년 6월 23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함으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사진은 국회에서 열린 야권 3당총재 회담. 왼쪽부터 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공화당 김종필 총재. [연합뉴스 자료 사진]

앞서 언급했던 두 사람의 당총재는 지금의 당대표와는 성격이 다르다. 한 사람의 거물 정치인이 한 정당을 쥐락펴락했다. 공천은 물론이고 당무 전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특히 특정 지역에 기반한 지역정당 성격이 강했던 당시에는 총재의 공천권 행사에 따라 국회의원 배지의 주인공이 결정됐다. 그래서 어떤 지역의 경우는 ‘나무 작대기를 공천해도 당선된다’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듯 당총재(黨總裁 party president)는 한 정당의 조직과 활동을 총체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대부분의 정당은 총재의 지도력에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도 대통령이 집권당의 총재가 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집권당의 총재는 대통령이었다.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과 함께 입법부의 정당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한 시절 거물 정치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총재가 있다. ‘3김(金)’으로 불린 이들 중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됐고, 한 사람은 DJP연합을 통해 국무총리가 됐다. 이들은 모두 당총재였다. 14대와 15대 대통령에 오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당의 총재직도 겸했다. 역시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야 간 정권교체가 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1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총재직을 내려놓으면서 대통령의 당총재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는 더 나아가 ‘당정 분리’가 현실화됐다. 정권교체로 여당에서 야당이 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도 총재직을 없애고 당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이후 대통령과 여당은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 여당 대표가 참여하는 고위 당정의회를 통해 협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국민의힘 황교안·천하람·안철수·김기현 당대표 후보(왼쪽부터)가 지난 16일 오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차 전당대회 광주·전북·전남 합동연설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황하게 당총재 얘기를 꺼낸 것은 대통령의 당 활동에 관한 것이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중요한 쟁점이 됐기 때문이다. 친윤계 인사로 꼽히는 동해 출신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은 “대선 때 후보와 당권을 가진 당대표가 분리돼야 한다는 취지로 ‘당정 분리론’이 나왔던 것이지, 집권 여당이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면 집권당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대선 때부터 윤석열 대통령과 이준석 당대표와 갈등이 당내 혼란과 국정의 난맥상을 가져왔다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정일체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친윤 핵심 인사들의 목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이준석 전 대표의 지원을 받고 있는 천하람 당대표 후보는 KBS 최경영의 최강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입법부의 역할을 행정부와 협력하는 것도 있지만, 감시하고 견제하는 부분도 있다”라며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나아가 이준석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정일체를 외치는 분들의 속내는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총선 공천 개입을 바라는 것 아닌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촉발된 대통령의 명예 당대표 추대논란은 당권행사를 둘러싼 집권 여당 내 권력투쟁 양상으로 비화하는 모양새다.

대통령은 헌법상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다. 그리고 정당의 대표는 입법부의 중요한 자리다. 앞에 ‘명예’라는 단서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당대표가 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다. 과거처럼 당총재의 막강한 영향력은 발휘할 수 없겠지만, 대통령이라는 영향력은 결코 이에 못지 않다. 대통령이 여당의 ‘1호 당원’이라는 상징성에서 벗어나 명예 당대표 지위를 갖게 된다는 것은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가 철저하게 관철돼야 하는 정당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당(黨)과 대통령’과의 긴밀성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을 명예 당대표로 추대하는 것은 역사적 퇴행이다.

천남수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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