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다이 하드’의 치매
1988년작 <다이 하드(Die hard)>는 인간적 영웅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이전 할리우드 액션영화들과 달랐다. 주인공 존 맥클레인 형사로 분한 브루스 윌리스(67)는 평범한 아저씨 외모, 특별한 전투기술 없이 현란한 말발과 침착함으로 악당들과 맞선다. 실베스터 스탤론, 아널드 슈워제네거 등 당대를 풍미했던 근육질 영웅과 다른 인간적 영웅이라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맨발, 러닝셔츠, 피투성이가 된 채 죽도록 고생하며 버티는 맥클레인은 “웬만해선 죽지 않는 사람” “완강한 저항자” “끝까지 버티는”을 뜻하는 ‘다이 하드’에 들어맞았다. 감독 존 맥티어넌은 <프레데터>를 함께 찍었던 슈워제네거에게 맥클레인 역을 제안했다는데, 슈워제네거가 맡았다면 우리가 아는 맥클레인 형사는 없었을 터다. 윌리스는 다이 하드 자체였다.
<다이 하드> 이후 세계적 배우가 된 윌리스는 성공적 커리어를 이어갔다. 출연작마다 편차가 있긴 했지만 <마지막 보이스카웃> <펄프 픽션> <제5원소> <아마겟돈> <씬 시티> <레드> 등 흥행작을 남겼다. 특히 1999년작인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는 역사상 최고의 반전으로 유명하며, 2007년 미국영화연구소에서 100대 영화로도 꼽혔다. 윌리스는 샤말란 감독의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에 출연했다. <식스 센스> 이후 <레이디 인 더 워터> <애프터 어스> 등 실패작을 냈던 샤말란 감독이 윌리스가 출연한 영화에서만큼은 일정 수준의 작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윈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다이 하드도 흐르는 세월은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일까. 윌리스의 가족은 16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그가 전두측두엽 치매(FTD)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지난해 3월 실어증에 따른 인지능력 저하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은퇴한 지 1년 만이다. 윌리스가 2020년 이후 수십편의 저예산 졸작 액션영화들에 무더기로 출연한 것도 치매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팬들은 영화 제작자와 윌리스의 조수가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윌리스를 착취해 커리어에 먹칠을 했다고 비판한다. 대배우의 영화 인생이 이런 식으로 저물어가는 것이 안타깝다. 윌리스가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한다.
이용욱 논설위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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