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참사 20년···국가는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돌보지 않았다

백경열 기자 2023. 2. 1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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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재난참사피해가족연대(가칭) 관계자들이 17일 오후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추모의벽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백경열 기자

민모씨(66)의 딸은 20년 전 대구지하철참사 때 고3이었다. 동성로에 있는 영어학원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던 그의 딸은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참사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날의 일은 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딸은 참사 직후 먹기 시작한 우울증약을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끊지 못했다.

올해 초에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갑상선에 종양이 발견돼 수술을 받았다.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딸은 이렇다 할 직장도 구하지 못했고, 얼마 전에는 파혼을 당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게 이유였다. 삶을 비관한 나머지 그의 딸은 지금까지 16차례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민씨는 “혼자서 딸을 돌보며 어렵게 살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은 계속되는데 지자체에서는 실태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설상가상으로 의료지원까지 그만두려고 한다니 화병이 날 지경”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전국재난참사피해가족연대(가칭) 관계자들이 17일 오후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추모의벽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백경열 기자

대구지하철참사가 발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부상자와 가족들의 아픔은 여전히 아물지 못하고 있다. 사회와 격리된 이들도 많아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지만 당국의 지원이 늦어지면서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동우 2·18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및 부상자가족대책위원장은 17일 “불과 어제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한 이가 있을 만큼 정신적·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상자와 가족들이 많다”면서 “호흡기와 후두 쪽에 문제가 생긴 분들이 많지만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2003년 2월18일 발생한 대구 도시철도 중앙역 화재참사로 당시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 등 모두 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대구시는 16년이 지난 2019년 10월에야 ‘대구 지하철화재 사고 부상자 의료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부상자 151명 중 136명이 지원대상에 선정됐고, 조례 제정 후 6명이 세상을 떠났다. 대구시가 지난해 부상자 130명을 대상으로 의료 지원 수요를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전화조사에선 56명 만이 응했다. 조사 결과 대부분(50명·89.3%)이 각종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추모의벽 앞에서 17일 한 유가족이 헌화를 하고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다. 백경열 기자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 설치된 ‘기억공간’ 내부 화재현장 보존벽의 모습. 백경열 기자

그러나 의료비 집행액과 이용자 수는 저조하다. 의료비 지원 시작 후 4년간 집행된 부상자 의료비는 예산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심리치료의 경우 연간 최대 40만원까지 지원하지만 치료비 청구는 2019년 5명, 2020년 9명, 2021년 2명 등 16명에 불과했다.

참사 발생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지원이 이뤄지는 탓에 신청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실제 대구시가 부상자들에게 치료 의사를 확인해 보니 치료 자체를 아예 포기하거나 귀찮다는 이유 등으로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적은 게 아니라, 일상적인 고통을 참으며 하루를 견딘다는 게 부상자위원회의 설명이다.

이 위원장은 “20년이 지나면서 부상자와 그 가족이 처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3의 기관을 통해 심도 깊은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의료지원 사업은 그마저도 조례 제정 5년차인 올해로 끝난다. 다만 대구시는 올해 심의위원회를 열어 1차례 연장할 계획을 갖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백종우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지하철 참사 당시에는 재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아 후속조치가 잘 이뤄지지 못했지만 여전히 고통받는 분들이 있다”며 “적극적인 실태조사를 통해서 치료가 이뤄지도록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상자들이 지속되는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신음하고 있는 반면 참사 희생자 유족들은 추모사업을 놓고 대구시와 갈등하고 있다. 유족들은 지하철참사를 계기로 들어선 2009년 시민안전테마파크를 ‘2·18기념공원’이라는 명칭으로 함께 표기하고, 현재 ‘안전상징 조형물’로 불리는 추모탑과 참사 희생자 32명이 묻힌 묘역의 이름도 성격에 맞도록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명애 2·18희생자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명칭 변경 등은 또다른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15일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민노총, 시민단체 등이 모여서 매년 해오던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식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오는 18일 추모식 불참을 선언, 유가족들과의 갈등은 더 깊어지고 있다.

전국재난참사피해가족연대(가칭)는 이날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추모의벽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재난과 참사가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반성도 없이 허무하게 잊혀져서는 안된다”며 “대구지하철참사를 지워내는 추모사업이 아니라 참사를 우리 삶의 곁에 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추모사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는 “사회적 재난으로 인한 심리적·사회적 갈등은 오래 지속되는 경향을 보인다”면서 “참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희생자와 부상자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시간을 통해 기억하고 피해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도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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