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독일 아동문학과 함께한 30년 번역 인생

한겨레 2023. 2. 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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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 │ 김경연 번역가
‘그림 형제 민담집’ 등 김경연 번역가
번역·아동문학에 빠진 우연한 계기
국내 최초 아동문학 관련 박사
5년 뒤 밝힐 마지막 대작 작업중
지난 2월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출판사인 현암사에서 만난 독일 아동문학 번역가 김경연씨.

책장을 한번 살펴보시라. 지난 20여년간 한결같이 사랑받은 <책 먹는 여우>(프란치스카 비어만, 주니어 김영사, 2001)나 <행복한 청소부>(모니카 페트 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풀빛, 2000), 또는 개구쟁이 ‘알폰소’나 귀여운 고양이 ‘핀두스’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시리즈 중 한 권쯤은 있지 않은가. 어린이책이지만 실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픈 부모들에게 더 사랑받은 <화가 나서 그랬어!>(레베카 패터슨, 현암주니어, 2016)를 아이가 훌쩍 자란 후에도 간직하고 있거나,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 <그림 형제 민담집>(그림 형제, 박은지 그림, 현암사, 2012)을 소장 중일 수도 있겠다. 1990년대부터 독일 현대 아동문학을 소개해온 만큼, 김경연 번역가의 책들은 이처럼 널리 그리고 오래 우리와 함께였다.

그가 번역 일을 시작한 건 우연에 가까웠다. 대학 시절 “낭만주의와 사회비판적 성향이 어우러진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끌린” 것을 인연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독일문학을 공부하던 김경연 번역가는, 당시 장학생에게만 주어진 특전이던 서울대 중앙도서관 내 폐가도서관 출입 권한을 누리며 유유자적하던 중 “10권쯤 되는 중요하고 묵직해 보이는 책들”을 발견했다.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전 2권, 열린책들, 초판 1992)이었다.

“1888년부터 15년간 시대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 몰락하고 재정립되는지 추적한 대하소설인데, 이 작품을 연구해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하니 한 선생님이 ‘석사과정 2년 안에 제대로 읽어낼 수나 있겠느냐’고 염려할 정도로 어려웠어요. 국내 출간이 안 된 상태라 연구를 하려면 일단 번역부터 해야 했고, 그 김에 출판사와 번역 계약을 하게 되었죠.” 그는 “청춘을 바쳤다”고 할 만큼 열정적으로 <몽유병자들> 번역에 매달렸는데, 책은 출판사를 두 차례나 바꿔가며 “몽유”하다 1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이후 공부를 겸해 문학이론서를 번역하던 그가 아동문학으로 눈을 돌린 것 역시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집에 큰불이 나서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둔 자료가 몽땅 타버린 것이다. 망연자실하던 중 어린이도서연구회에 들렀다가 “아동문학 이론서가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논문 주제를 독일 아동문학으로 바꿔 절치부심한 끝에 ‘국내 최초의 아동문학 관련 문학박사 학위 소지자’가 되었다.

지난 2월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출판사인 현암사에서 만난 독일 아동문학 번역가 김경연씨.

그가 독일 아동문학을 연구하며 자연스레 작품을 번역한 덕분에 우리는 그림 형제가 평생에 걸쳐 모으고 다듬은 251편의 옛이야기를 담은 완역본 <그림 형제 민담집>을 만났고, 원작이 실은 매우 잔혹하고 엽기적이라는 충격적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페터 헤르틀링(<욘 할아버지>, 비룡소, 1997), 볼프 에를부르흐(<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 풀빛, 2002),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 풀빛, 2005), 구드룬 파우제방(<그냥 떠나는 거야>, 풀빛, 2010), 우베 팀(<달려라 루디>, 창비, 2012), 숀 탠(<빨간 나무>, 풀빛, 2019), 스벤 노르드크비스트(핀두스 시리즈), 구닐라 베리스트룀(<우리 친구 알폰소>, 다봄, 2022)과 같은 당대의 독일·북유럽 아동문학 작가들이 그의 손을 거쳐 우리 곁에 왔다.

“그림책을 번역하면서 편집자들을 괴롭히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림책은 누군가 읽어주는 책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번역하는 내내 읽고 또 읽지만, 편집자들에게도 계속 읽어봐 달라고 해요. 혀가 꼬이거나 발음이 불편하지 않은지, 대체할 더 좋은 표현이 있는지 끊임없이 묻죠. 어린이 독자들이 ‘듣는’ 책이니까, 우리말의 운율이나 아름다움을 살려 번역하려고 애쓰고요.” 이처럼 의미소를 다치지 않는 선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기에, 그는 번역이 옮기는 것(translation)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해석하는 것(interpretation)이라고 여긴다.

30년 넘게 번역을 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그 책과 새로 교제하듯 매번 빠져든다”는 그는 지금 아마도 번역 인생의 마지막 대작이 될, 원고지 1만 매 분량의 방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 형제 민담집> 못지않게 고된 여정일 테고, 또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 될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5년 후쯤 공개될 예정이다.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을 옮겼어요

행복한 훈데르트바서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거나 “그림은 식물처럼 조금씩 조금씩 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던 훈데르트바서를 처음 알게 된 순간, 김경연 번역가는 전율을 느꼈다. 화가이자 건축가, 환경·평화운동가인 훈데르트바서의 삶과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입문서.

바바라 슈티프 지음, 현암사(2010)

그림 형제 민담집

기획에서 출간까지 10여 년이 걸린 이 책엔 김경연 번역가의 청춘이 담겼다. 원작 출간 200주년을 맞아 2012년 국내 출간됐는데, 당시 김경연 번역가는 “100년은 팔아야 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심혈을 기울여 옮긴데다, 클래식은 영원하니까.

그림 형제 지음, 박은지 그림, 현암사(2012)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

독일아동청소년문학상 제정 60주년을 맞아 수상·후보 작가들로부터 스무 개의 단편을 기고받아 엮었다. 그림을 그린 알료샤 블라우 또한 수상자다. “기라성 같은 아동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한 권에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다비드 칼리 외 19인 지음, 알료샤 블라우 그림, 사계절(2019)

핀두스의 특별한 이야기(전 10권)

고양이 핀두스와 페테르손 할아버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핀두스’ 시리즈는 노르드크비스트 작가 특유의 유쾌함과 따뜻함이 이야기와 그림에 흠뻑 배어 있다. 고양이 집사인 김경연 번역가에겐 특히나 사랑스런 책.

스벤 노르드크비스트 지음, 풀빛(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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