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소총 한 자루가 전하는 ‘비극의 현대사’

박세희 기자 2023. 2. 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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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구석에서 양쪽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의 외투는 해졌고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길남과 그가 키우던 개의 비참한 죽음, 그저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무근, 짧은 평생 빨치산으로 살다 간 소녀의 이야기에 배우도, 관객도 눈물을 참기 힘들다.

한물간 작가 나나와, '술 때문에' 그녀와 한배를 타게 된 제작사 대표의 드라마 편성을 위한 좌충우돌이 웃음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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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역사 관통한 연극 ‘빵야’
1945년산 낡은 장총 의인화해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부터
학도병·빨치산 소녀 등 거쳤던
기구했던 생애 고스란히 담아
총 이야기로 드라마 복귀 꿈꾸는
작가의 좌충우돌은 웃음 포인트
연극 ‘빵야’의 한 장면. 일제 장총을 의인화해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을 재조명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무대 구석에서 양쪽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의 외투는 해졌고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다리를 절뚝인다. 옛 일본 황실의 국화 문양이 목덜미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빵야’. 1945년 2월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난 99식 소총이다. 연극 ‘빵야’의 주인공은 이 장총이다. 사람으로 의인화된 장총의 이야기를 통해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가 드라마 소품실에 있는 장총을 발견하고, 장총을 소재로 드라마 대본을 써 편성되기까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하나, 이제껏 빵야를 거쳐 간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빵야의 첫 주인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기무라. 기무라는 빵야로 수많은 조선인을 죽인다. 이후 조선인 병사 길남,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은 포수의 딸 강선녀의 손으로 넘어간 ‘빵야’는 제주 4·3사건이 벌어지던 해 제주도 국방경비대였던 순진무구한 청년 무근에게 전해진다. 서북청년단과 학도병, 북한군 의용대, 빨치산 토벌대와 빨치산 소녀를 거친 빵야는 사냥꾼의 총이 됐다가 건설업자에게 넘어간 뒤 영화제작자의 손으로 들어가 영화 촬영의 소품이 된다.

빵야의 기구한 삶은 비참했던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길남과 그가 키우던 개의 비참한 죽음, 그저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무근, 짧은 평생 빨치산으로 살다 간 소녀의 이야기에 배우도, 관객도 눈물을 참기 힘들다. 자신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는 빵야의 마음도 와 닿는다. 빨치산 소녀의 자결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두 번은 불발시키지만 끝내 발사된 총알에 죽어가는 소녀를 보며 울부짖는 빵야는 애처롭다. 연극 ‘빵야’는 중국 시인 두보의 시구 한 구절을 빌려 관객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기에 우울함으로 가득한 무거운 극일 것 같지만 빈틈없이 촘촘한 전개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3시간 가까운 공연시간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한물간 작가 나나와, ‘술 때문에’ 그녀와 한배를 타게 된 제작사 대표의 드라마 편성을 위한 좌충우돌이 웃음 포인트다. 잘 짜인 동선 속에서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배우들의 움직임도 놀랍다. 배우들은 연신 총을 쏘고 맞고 쓰러지며 혼신의 연기를 선보인다.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26일까지.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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