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소총 한 자루가 전하는 ‘비극의 현대사’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무대 구석에서 양쪽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의 외투는 해졌고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길남과 그가 키우던 개의 비참한 죽음, 그저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무근, 짧은 평생 빨치산으로 살다 간 소녀의 이야기에 배우도, 관객도 눈물을 참기 힘들다.
한물간 작가 나나와, '술 때문에' 그녀와 한배를 타게 된 제작사 대표의 드라마 편성을 위한 좌충우돌이 웃음 포인트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45년산 낡은 장총 의인화해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부터
학도병·빨치산 소녀 등 거쳤던
기구했던 생애 고스란히 담아
총 이야기로 드라마 복귀 꿈꾸는
작가의 좌충우돌은 웃음 포인트
무대 구석에서 양쪽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의 외투는 해졌고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다리를 절뚝인다. 옛 일본 황실의 국화 문양이 목덜미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빵야’. 1945년 2월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난 99식 소총이다. 연극 ‘빵야’의 주인공은 이 장총이다. 사람으로 의인화된 장총의 이야기를 통해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가 드라마 소품실에 있는 장총을 발견하고, 장총을 소재로 드라마 대본을 써 편성되기까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하나, 이제껏 빵야를 거쳐 간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빵야의 첫 주인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기무라. 기무라는 빵야로 수많은 조선인을 죽인다. 이후 조선인 병사 길남,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은 포수의 딸 강선녀의 손으로 넘어간 ‘빵야’는 제주 4·3사건이 벌어지던 해 제주도 국방경비대였던 순진무구한 청년 무근에게 전해진다. 서북청년단과 학도병, 북한군 의용대, 빨치산 토벌대와 빨치산 소녀를 거친 빵야는 사냥꾼의 총이 됐다가 건설업자에게 넘어간 뒤 영화제작자의 손으로 들어가 영화 촬영의 소품이 된다.
빵야의 기구한 삶은 비참했던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길남과 그가 키우던 개의 비참한 죽음, 그저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무근, 짧은 평생 빨치산으로 살다 간 소녀의 이야기에 배우도, 관객도 눈물을 참기 힘들다. 자신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는 빵야의 마음도 와 닿는다. 빨치산 소녀의 자결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두 번은 불발시키지만 끝내 발사된 총알에 죽어가는 소녀를 보며 울부짖는 빵야는 애처롭다. 연극 ‘빵야’는 중국 시인 두보의 시구 한 구절을 빌려 관객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기에 우울함으로 가득한 무거운 극일 것 같지만 빈틈없이 촘촘한 전개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3시간 가까운 공연시간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한물간 작가 나나와, ‘술 때문에’ 그녀와 한배를 타게 된 제작사 대표의 드라마 편성을 위한 좌충우돌이 웃음 포인트다. 잘 짜인 동선 속에서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배우들의 움직임도 놀랍다. 배우들은 연신 총을 쏘고 맞고 쓰러지며 혼신의 연기를 선보인다.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26일까지.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진중권, ‘헌정사 첫 野대표 구속영장’에 “혐의 많은 대표 뽑은 게 초유”
- 중국에 의해 대만 몰락하면…“北의 남침 가능성” 분석
- 중도 이탈에 ‘이재명의 민주당’ 흔들...與 지지로 이동 시 치명타
- “아나운서는 벗으면 안 되나요?” 진격의 언니들 “김나정 주장 유감”
- “핵무기 발사 비번 알아낼 거야😈” …AI 챗봇이 털어놓은 ‘어두운 욕망’
- 박지현, “체포동의안 가결시켜야”…“이 대표 대선 때 약속 지켜라”
- “75세 넘는 정치인은 정신능력 검사해야”…나이 많은 바이든·트럼프 저격한 51세 니키 헤일리
- 점입가경 치닫는 ‘SM 경영권 전쟁’
- 영화 ‘다이하드’ 액션 스타 브루스 윌리스 치매 진단
- 정유라 “조민 멘탈 부러워…엄마 감옥 가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