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과거는 외국어, 기억은 번역이다

한겨레 2023. 2.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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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빗대는 수사는 아주 낯설지 않다.

독특한 구성으로 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사진은 작중 에이미의 것이기도 하고 작가의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사진 아래 짧은 문장은 과거의 번역어로 읽힌다.

과거의 편린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문장들에 작가이자 번역가인 크로프트의 (주로 번역에 관한) 사유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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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의 다시 만난 여성]이주혜의 다시 만난 여성

집앓이
제니퍼 크로프트 지음, 이예원 옮김 l 밤의책(2022)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빗대는 수사는 아주 낯설지 않다. 여기에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제니퍼 크로프트는 ‘번역’이라는 개념을 덧붙인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한 권의 책과 같은데, 오늘이라는 한 페이지를 쓰는 동시에 지금껏 써 온 페이지들을 끝없이 재번역하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아가는 일이라고 말이다. 크로프트의 시선으로 보면 과거는 외국어로 쓰인 채 언제나 새로운 해석과 번역을 기다리며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존재다. 번역이 불능을 포함한 수많은 가능성들 사이를 더듬어 가는 일이라면 과거의 번역 역시 가능과 불가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불안과 위태로움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돌아가고 또 돌아가 기꺼이 불능을 감수하게 한다는 점에서 과거는 저마다의 절대적 원서로 기능한다.

미국 오클라호마에 사는 에이미와 조이는 세 살 터울의 자매다. 동생 조이가 원인 불명의 발작을 겪기 시작하면서 부모는 두 아이의 홈스쿨링을 결정한다. 지적 호기심, 특히 언어에 대한 욕구가 컸던 언니 에이미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 사랑이 러시아어 가정 교사 사샤에게 흘러들어 가면서 혼자 비밀스러운 감정을 키워나간다. 언제 어디서나 한 몸과 같았던 에이미와 조이 사이에 비밀이 생기고 자매의 성장과 함께 비밀도 늘어간다. ‘첫사랑’ 사샤를 잃은 에이미는 대학에 조기 입학하게 되고 가족과 떨어져 홀로 생활하며 외롭고도 버거운 성장을 시작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고 (혹은 버리고) 떠나온 곳에서 앓이가 시작되는데, 흔히 ‘집앓이(homesick)’로 표현되는 이 증상이 향하는 곳이 과연 집 자체인가, 혹은 집에 깃들었던 사람들과의 기억인가, 아니면 사랑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인가를 탐색하는 이야기로 책 한 권이 완성되었다.

<집앓이>는 실제로 홈스쿨링을 하다 익히게 된 러시아어를 더 공부하려고 에스에이티(SAT)를 쳤다가 상위 1% 이내의 성적을 내면서 열다섯 살에 대학 조기입학,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유학한 후 다양한 언어로 문학 번역에 참여하던 중 2018년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을 번역한 공로로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제니퍼 크로프트의 자전소설이다. 독특한 구성으로 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사진은 작중 에이미의 것이기도 하고 작가의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사진 아래 짧은 문장은 과거의 번역어로 읽힌다. 과거의 편린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문장들에 작가이자 번역가인 크로프트의 (주로 번역에 관한) 사유가 드러난다. “단어 하나하나가 아우르는 방대한 경험들을 되짚다 보면 번역이 가능한 단어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고 밝힌 작가는 “번역어가 없는 단어도 간혹 있”다고 체념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른 이에게서 우리가 그토록 얻으려 드는 피난처이자 사랑하기로 선택한 이들에게 우리 스스로 되어 주는 안식처”임을 인정하고 십수 년간의 헤어짐 끝에 “집을 앓는다는 말이 너를 그리워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최종 해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인생은, 책은, 기억의 번역은, 집앓이는,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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