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교수의 정보의료·디지털 사피엔스]'헬렌 켈러 모먼트'가 필요한 챗GPT

정현정 2023. 2. 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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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고의 성녀'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 만에 심한 열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니 말을 조금도 배울 수 없었다. 켈러는 시각·청각·언어의 세 가지 장애를 모두 앓았지만 하버드대 레드클리프대학에서 시청각 장애인 최초의 학사학위를 받고 사회운동가로 명성을 떨쳤다. 헬렌의 모든 고난 극복을 함께한 이는 그녀의 가정교사이자 동반자였던 앤 설리반이다. 1887년 3월 도착한 앤 설리번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고자 했다. 설리번은 자신이 가져온 선물인 인형을 뜻하는 'd-o-l-l'의 스펠링을 손동작으로 헬렌의 손바닥에 전달해서 선물 '인형'과 단어 'Doll'을 연결해 주려 했다. 헬렌의 손에 차가운 물로 적시며 '물'(w-a-t-e-r), 책상을 만지며 '책상'(d-e-s-k)을 반복적 손동작으로 전했다. 헬렌은 자신이 매일 마시고 얼굴을 씻은 '물'이 무엇인지, 책상이 무엇인지, 인형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물'을 손동작 'w-a-t-e-r'라는 이름으로 짝짓는 행위를 손바닥을 스치는 손동작으로 받아들였을 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켈러는 1887년 5월 5일을 '내 영혼이 태어난 날'로 회상했다. 설리번이 '머그잔'을 쥐어 주고 'm-u-g' 손동작을 반복했지만 단어 공부에 크게 좌절해 있던 헬렌은 머그잔을 깨뜨렸다. 그 순간 헬렌의 손은 마치 '원숭이의 흉내 짓처럼' 자신도 모르게 설리번의 'm-u-g' 손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설리번과 격하게 다투고 감정이 극도로 고조된 상태에서 펌프로 길어 올린 물이 헬렌의 손을 적시며 흘러내렸을 때 손바닥에서 춤추는 선생의 손동작 'w-a-t-e-r'에 헬렌은 깊은 심연을 두드리는 깨우침과 의식의 달음박질에 사로잡혔다. 지금 이 순간 내 손을 차갑게 타고 흘러내리는 그 멋진 '물'은 그 손동작과 결합됐다. 헬렌은 설리번의 손을 이끌고 뛰어다니면서 나무를 만지며 이것이 '나무'였는지, 의자를 만지며 이것이 '의자'였는지, 침대를 만지며 이것이 바로 '침대'를 말하려 한 것이었는지 확인하며 '단어의 폭발'을 체험했다. 손동작으로 전달된 단어는 헬렌의 영혼을 깨우고 빛과 자유를 선물했다.

'기호주의 AI'(Symbolic AI)와 '연결주의 AI'(Connectionist AI)는 인공지능(AI)의 양대산맥이다. 기호주의가 '연역적' 접근이라면 연결주의는 논리와 무관하게 빅데이터를 구겨 넣으면 최적의 함수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귀납적' 접근이다. 챗GPT는 연결주의 인공신경망에 수많은 문구를 학습해서 '귀납적'으로 '언어모형'을 터득했다. 그동안 입체적으로 탐구돼 온 '구문' '의미' '맥락'을 납작한 단일 계층에 뒤섞어 놓은 묘한 모형이다. 새로운 언어모형의 성공은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모형의 성공은 '기호'와 '실물'의 결합을 떼어낸 채 데이터화한 기호들만의 연결로 구성된 '언어계'의 독립성을 실증했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알아 온 연역적 '논리연산' 및 귀납적 '데이터계산'과도 구분되는 제3의 '중간계'이며, '언어연산 규칙'의 독자성을 띤다.

마음속 '생각'과 바깥세상 '실물'은 언어로 표현되고 언어로 소통되지만 언어는 인터페이스일 뿐 '생각'도 '실물'도 아니다. 헬렌은 '물'이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띠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단어 '물'을 스스로 체득한 '물'과 결합하기까지 긴 고통과 큰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동안 컴퓨터 코드에 '물'을 간단히 '물'에 배정(Assign)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언어모형의 성공으로 AI가 그동안 살아온 '중간계'를 넘어 인류의 근원적 체험인 '생각'과 '기호', '실물'과 '기호' 사이의 결합(Binding)이라는 '헬렌 켈러 모먼트'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그다음 질문이 던져졌다.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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