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정신’ 강조... 원로 사학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유석재 기자 2023. 2. 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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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의궤, 평전, 과거 급제자 분석 등
실증 연구로 조선시대 재평가
1997년 한국사 通史 저술도
2017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한영우 교수. 그는 “학자는 현실에 관심을 갖되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연구실에서 천수를 다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편협한 국수주의와 주체성이 없는 세계주의는 모두 위험합니다. 자기 역사에 뿌리를 두고 남을 이해할 때 생존 능력은 몇 배로 커질 것입니다.”(1997년 본지 인터뷰)

국내 대표적 역사학자이자 한국사 통사(通史) ‘다시 찾는 우리 역사’의 저자인 호산(湖山) 한영우(85) 서울대 명예교수가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충남 서산 출신으로 온양고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한국사연구회장,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장과 규장각 관장, 이화여대 이화학술원장 등을 지냈다.

한 교수의 전공은 조선시대사였고, 사학사·사회경제와 사회사상을 중심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 갔다. 규장각이 소장한 조선 의궤(儀軌)를 10여 년 연구한 결과인 ‘조선왕조 의궤’(2005)를 출간해 조선 문화의 풍부함을 고찰했고, 과거 급제자 1만5000명을 분석한 ‘과거, 출세의 사다리’(2013)에선 ‘조선은 소수 가문이 벼슬을 독점한 폐쇄적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실증적 연구로 식민사관에 의해 부정적으로 평가된 한국 역사, 특히 조선 왕조를 재평가했다. 그는 “조선 시대의 모든 것을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민(文民) 정신을 본받자는 것”이라고 했다. 문민 정신이란 “지배층의 이상주의와 집권자에 대한 견제 기능이 균형을 이뤘던 것”이었다.

그는 ‘선비 정신’이야말로 한국인의 문화적 DNA라고 말했다. 조선 유학자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고조선부터 지금까지 한국 지식인에게 전승된 정신으로서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상생(相生)의 공동체 문화이며,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가 함유된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학계에서도 대가(大家)만 쓰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사 통사를 쓴 학자로도 유명하다. 1997년 출간한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한국사를 고대연맹국가부터 현대민주국가까지 여섯 시대로 구분했으며, 현대사 서술에선 “이승만의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상의 주요 인물을 철저히 고증해 평가한 평전(評傳) 작업도 진행했다. 정도전, 이이, 성혼, 정조, 세종, 서경덕 등의 인물이 그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해석됐다. 이미 병세가 악화된 지난해 3월 ‘허균 평전’을 낸 뒤 본지와 마지막 인터뷰에서 “허균은 백성이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섭다고 경고했다”고 강조했다.

옥조근정훈장(2003)과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대통령 표창(2005), 한국출판문화상(2006), 민세상(2012) 등을 받았다. 2020년 평생 모은 장서 1만2000여 권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는데, 이삿짐 트럭 9대 분량을 봉천동에서 과천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유족은 아내 김채중씨와 아들 한정훈 성균관대 교수, 한승현 건국대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8일 오전 7시, (02)207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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