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딪쳐봐야 자신의 가능성 알 수 있어… 도전할 용기 갖길”

장한서 2023. 2. 1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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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점 무보급 도달’ 김영미 대장
“떠나기 전 1년 6개월간 지옥훈련
육체적 고통 예상보다 훨씬 심해
바람 거세질 때면 체감 영하 28도
지인들 응원 담긴 녹음 듣고 버텨
짐·체중 등 줄수록 마음도 비워져
체중 14kg 빠져… 회복 집중 예정”
강원도 평창의 한 산골 소녀는 산이 친숙했다. 산 밑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집 주변엔 아스팔트로 된 길조차 없었다. 친구 집에 가기 위해 뒷산을 넘었다. 소녀가 본격적으로 산에 빠져들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 강릉대학교에 입학한 뒤 산악부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방학 때마다 2∼3개월 동안 덩치만 한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다녔다. ‘연례행사’처럼 강릉에 있는 대학부터 평창의 집까지 오대산을 둘러친 다섯 개의 봉우리를 건너 ‘귀가’하기도 했다. 텐트 대신 낙엽을 베고 잤다. 산과 사랑에 빠져 ‘산악인’이 됐고, 도전정신으로 탐험까지 즐기기 시작했다.
‘산악인’ 김영미 대장이 14일 서울 중구 명동 이비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언론 합동 인터뷰에서 무보급 남극점 도달 여정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영원아웃도어 제공
결국, 이 산골 마을 출신의 소녀는 시간이 흘러 ‘남극점’까지 도달했다. 2003년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 2008년 국내 최연소 7대륙 최고봉 완등 기록을 세우고 2017년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723㎞를 홀로 건넌 뒤 달성한 위업이다. 남위 90도에 도착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만 ‘1186.5㎞’. 어떤 보급도 받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100㎏이 넘는 무거운 썰매를 50여일 동안 끌었다. ‘무보급 단독 남극점 도달’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다. 세계에서 따져도 여성 중엔 12명뿐이다.

그 주인공은 김영미(42·노스페이스 애슬리트팀) 대장. 어릴 적부터 등산과 모험을 즐긴 김 대장은 역사를 새로 썼다.

“육체적인 고통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했어요. 산에 다닌 23년의 세월 속에서 겪은 고통을 51일간 압축해서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죠. 하지만 마음을 다잡아야 할 정도로 흔들리지는 않았어요. 그간의 훈련과 자신을 믿었습니다.”

김 대장은 14일 서울 중구 명동 이비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언론 합동 인터뷰에서 무보급 남극점 도달 여정의 어려움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김 대장은 지난달 17일 남극점 도달에 성공하고 이후 국내로 입국한 뒤 휴식을 취하느라 뒤늦게 여정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처음부터 혼자 떠날 계획은 아니었다. 함께 가기로 했던 동료가 있었지만 개인적인 상황으로 어렵게 됐다. 의지가 완고했던 김 대장은 해외 여성 탐험가의 성공기 등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 가기로 마음먹은 뒤론 끝없이 훈련했다. 김 대장은 노르웨이 등에서 맨몸으로 썰매를 끌고, 타이어를 몸에 묶고 산을 오르는 등 약 1년6개월간 자신과 싸움을 했다.
하지만 남극점으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매서운 바람이 만만치 않았다. 바람이 거세지면 체감 온도는 영하 28도까지 떨어졌다. 냉동고 같은 곳에서 맞바람을 뚫고 10시간을 넘게 걸었다. 잠도 자기 힘들 정도로 근육통이 심했다. 나침반이 고장 났을 땐 아찔했다. 방향을 알 수 없어 갇힌 느낌이 들었다. 나침반을 고치기 전까진 햇빛 아래 그림자를 보고 방향을 감지했다. 그간의 훈련 시간과 축적된 노하우를 믿었다.

힘들 때마다 지인들의 응원도 떠올렸다. 김 대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설악산 동굴 소리 등 자연의 소리와 지인들의 응원이 담긴 녹음을 가져가 들으며 힘을 냈다. ‘건강하게만 돌아오라’는 주변의 염원을 떠올리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특히 김 대장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김 대장은 “원래 출국하면 집 생각이 전혀 안 나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아프셔서 많이 염려됐다. 여정 도중에 위성 전화로 연락했고, 많이 호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아버지도 잘 이겨냈는데, 나도 잘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김 대장은 이번 여정을 통해 ‘비움’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김 대장이 찬 스마트워치는 이동한 거리가 쌓였고, 그의 위성항법체계(GPS) 장치는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를 나타냈는데, 걸은 거리가 늘어나는 것보다 남은 거리가 줄어드는 게 반가웠다. 김 대장은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도 줄고, 체중도 줄고, 남은 거리도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비워지는 것 같았다. 남은 거리가 ‘0’이 됐을 땐 그 자체가 비움의 ‘0’이었다”고 회상했다.

남극 원정으로 체중이 14㎏ 빠진 김 대장은 당분간 회복에 집중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도전을 이어오며 수십년간 얻은 용기는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극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심한 시간이 많았어요. 하지만 사람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고, 일단 부딪쳐 봐야 내가 가능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도전하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모두 가졌으면 좋겠어요.”

장한서 기자 jh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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