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마른 여자되기를 강요하는가

이유진 2023. 2. 1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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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바디올로지][이유진의 바디올로지] 05 _거식증

임옥희는 논문 ‘은유로서의 거식증’에서 거식증이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려는 여성의 육체언어라고 보았다. 박탈감, 상실감, 결여,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 거식증 환자들은 날씬한 몸을 강요하는 시선에 순응하는 ‘유순한 몸’인 동시에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몸이 된다.

미국 영화 <투 더 본>의 한 장면. 20살 주인공 엘런은 뼈만 남은 몸으로 등뼈에 멍이 들 정도로 쉼없이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아이는 먹지 못한다. 너무 굶어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몸이 애처롭다. 계속 먹지 않으면 심장이 멈출 수도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결국 부모는 입원 치료를 결정했는데, 수액을 맞기 시작하자 아이는 공포에 질려 자지러지게 울었다. 살찔까봐 두려워서. 최근 텔레비전의 한 상담 프로그램에서 본 10살 여자아이 이야기다.

여자들이 말라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거식증(신경성 식욕부진)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2017년 1661명에서 2021년 2201명으로 늘었다. 2021년 거식증 환자의 75%(1648명)는 여성이고 이 중 10대는 25%(418명)에 이르렀다. 더 충격적인 건 10대 여성 거식증 환자의 절반 이상(210명)이 10~14살 어린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거식증으로 병원을 찾는 이가 소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상황은 더 심각할 수 있다. 정확한 조사와 통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에서는 여성의 5~10%가 평생 한번은 거식증에 걸린다고 하고, 영국은 거식증 환자를 250만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흔히 거식증이라 일컫는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먹는 것과 관련해 어려움을 겪는 섭식장애의 대표적 질환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먹는 ‘신경성 폭식증’으로 바뀌기도 한다. 거식증 환자는 살찌는데 공포를 느끼며 음식을 제한하고 체중을 감량한다. 흔히 저체온, 저혈압, 무월경, 우울증까지 동반한다. 거식증은 완치가 어렵고 치사율이 약 5%에 이르러 정신질환 중 가장 사망률이 높다.

한국의 10대 여성 청소년들이 거식증을 동경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사회연결망서비스에서 ‘#프로아나’ ‘#뼈말라’ ‘#자극짤’ 등을 검색하면 놀랄 만큼 앙상한 여성 신체 사진을 만날 수 있다. ‘프로아나’(프아, pro-anorexia )는 거식증을 찬성한다는 뜻의 초절식 또는 초절식인을 뜻한다. 장기간 먹지 않고 살을 빼는 ‘조임’은 물만 먹는 단식이나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먹토’로 이뤄진다. 장원영, 아이유 등 여성 아이돌 사진은 ‘프아’들의 살빼기 욕구를 자극하는 ‘자극짤’로 인터넷에 떠돈다.

프로아나의 최종 목표는 키에서 몸무게를 뺀 ‘키빼몸’이 120 이상 되는 것이다. 한국 성인여성 평균키 160㎝라면 몸무게가 40㎏을 넘어서는 안된다. 너무 심한가? 하지만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의 이상형이야말로 배짝 마른 여성들이었다. 1989년 이미 미스코리아 입상자들의 평균 키는 173.6㎝, 몸무게는 51.3㎏로 이들의 ‘키빼몸’은 122를 넘었다. 오래 전부터 한국 사회는 ‘뼈말라’ 몸매를 ‘미인’의 조건으로 꼽았던 셈이다. 피골이 상접한 ‘해골 모델’ 같은 대중문화 속 여성 이미지는 실제 여성의 몸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거식증 환자에게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먹방’에 과몰입한다. 식욕에 못 이겨 ‘입이 터지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먹는다. 그리고 토한다. 프랑스 임상의사인 자크 마이에는 거식증 환자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음식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거식증을 다룬 미국 영화 <투 더 본>에서 여성 환자들은 조금만 먹어도 토한다. 20살 주인공 엘런은 뼈만 남은 몸으로 쉼없이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마이에는 과도한 육체활동과 지적인 과잉활동도 거식증의 증상이라고 보았다.

유전적 요인, 우울증, 노이로제 등 거식증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다.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거식증을 연구한 미국 학자 수전 보르도는 거식증 환자들이 ‘몸’을 업신여기는 서양철학 전통 위에 서있다고 설명한다.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나타난 보르도의 분석을 종합하면, 플라톤부터 데카르트까지 서구 남성 철학자들은 이성과 정신이 육체적인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거식증 환자는 자기만의 왕국에서 독재자가 되려 한다. 미국 에세이스트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거식증에 걸린 자신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몸은 진압해야 하는 나라이며, 몸의 욕구들은 뿌리뽑아야 하는 적군들”이었다고 그는 썼다. 굶기를 통해 몸이라는 불결하고 오염된 자아, 여성적 자아를 더 위대한 정신과 지성으로 지배하는 나 자신은 불굴의 투지를 지닌 남성적인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1995년 영화 <301·302>(감독 박철수)는 여성의 거식증과 폭식증을 다뤄 파문을 일으켰다.

반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여성’은 성적 탐욕과 방종을 상징한다. ‘남자 잡아먹는 여자’는 가부장제의 가장 큰 적이다. 보르도는 15세기 마녀사냥 교본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의 이야기를 꺼낸다. 마녀는 문란한 성욕으로 요술을 부리며 아이들을 한 솥 가득 삶아 먹고 악마와 동맹을 맺는다. 식욕을 참지 못해 ‘먹는 여성’이 마녀라면, 식욕을 참고 제 살과 피와 뼈를 남편과 아들들에게 ‘먹이는 여성’은 어머니가 되고 여신이 된다. (아들 오백명을 먹이려다 솥에 빠져 죽은 제주 설문대할망 설화 같은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비슷한 버전이 있다.)

임옥희는 논문 ‘은유로서의 거식증’에서 거식증이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려는 여성의 육체언어라고 보았다. 박탈감, 상실감, 결여,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거식증 환자에겐 특히 ‘여성’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여자아이들이 살찌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2차 성징을 늦추려는 이유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살이 없는 여성의 몸은 중성적이다. 섹슈얼리티가 삭제된 해골 같은 몸은 성폭력의 위협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거식증을 겪은 이들은 무월경을 훈장처럼 여기기도 한다. 이렇게 거식증 환자들은 날씬한 몸을 강요하는 시선에 순응하는 ‘유순한 몸’인 동시에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몸이 된다.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거식증을 상담한 것으로 유명한 정신분석가 겸 페미니즘 활동가 수전 오바크는 ‘모든 사람의 몸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남긴 은밀한 각인이 찍혀 있다’고 본다. 그는 섭식장애가 부모-자식간 분리와 의존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몇몇 전문가들은 거식증 이슈가 욕망이 좌절돼 자식들에게 지배적인 어머니와, 이를 외면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분석한다. 캐럴라인 냅은 자신의 거식증 중심에도 분명 불행한 부모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거식은 좀 더 본질적으로 여성 전반이 직면한 허기, 응답받지 못한 갈망, 세계와 어긋난 자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굶기를 통해 여자들은 인생을 끈질기게 압박하는 슬픔, 내면의 욕망과 허기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이런 허기의 연장선상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같은 여성’들이라고 모두 거식증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는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다이어트가 여성의 정치적 힘을 빼앗는다고도 말한다. 허약한 인구는 다스리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식증을 경험한 여성들은 무력함을 강조하거나 자본주의와 가부장적인 명령에 순응해 살을 빼고자 한다는 식의 비판을 강력히 거부한다. 남성의 눈에 들기 위해 굶는 것이 아님을 밝히려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하는 이들도 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거식증과 프로아나 당사자들을 가부장제 질서에서 탈주하면서도 적극 교섭하는 ‘주체적인 존재’라고 분석한다. (‘프로아나: 몸 정치성의 교란’, 류지현 조윤희 원용진, 2021)

최근 1~2년 동안 섭식장애를 겪은 당사자들의 책이 국내에 여러권 출간됐다. 오는 24일부터 3월2일까지 서울 독립서점들에서 거식증을 경험한 당사자, 전문가 등이 강연과 토크를 하는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도 열린다. 행사를 주관하는 ‘잠수함토끼 콜렉티브’는 <삼키기 연습>의 저자 박지니씨 등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모임으로, 잠수함 속 희박한 공기를 알려주는 토끼처럼 섭식장애 인식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보르도는 거식증 환자를 “기이한 병의 희생자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주는 우리 문화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 자신 사춘기 시절 거식증을 앓았던 미국의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거식이 오히려 “미친 현실”에 맞서 자기를 방어하려는 마땅한 항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거식증 경험자들은 ‘환자’가 아니라 이 사회의 ‘정치범’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거식은 정치적 진정제라기보다 치료제에 가까울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극단적인 마른 몸을 아름답다고 보는 시선, 날씬한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기회, 몸이 큰 여성을 비난하고 수치심 주기…. 이 모든 것이 여성을 굶주리게 한다.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굶는다는 건, 점점 더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신호다. 위험한 건 굶는 여성이 아니라 굶기는 사회다.



이유진 | 토요판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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