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때문에 사람들 죽었다”…대선 앞 ‘에르도안 심판론’ 확산

조해영 2023. 2. 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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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대지진][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13일 아침(현지시각) 튀르키예 말라트야 바탈가지 한 창고에서 주민들이 구호단체가 나눠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말라트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사상 최악의 지진 피해로 3만명 넘는 이들이 희생된 튀르키예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5월 대선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 발생한 참사로 ‘강권적이지만, 유능한 지도자’라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화에도 큰 금이 가는 모습이었다.

13일(현지시각) 지진 영향권인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만난 시민들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미숙한 재해 대응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기민한 대처가 쉽지 않은 새벽 4시에 규모 7.8이라는 대지진이 발생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정부 대응이 너무 늦고 엉성했다는 것이다.

이번 지진의 간접 영향권에 든 아다나에서 만난 초등학교 교사 누케트 셀마 외즈튀르크(53)는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에는 악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지진 발생한 초기에 “컨트롤타워가 사실상 없었고 사흘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수습 작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비판적이었지만, 이번 지진을 통해 더 냉소적이 됐다. 누게트는 “당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자리도 필요하고 국가에서 관리해줘야 하는 것들이 많다”며 “이번 재난이 완전히 해결되는 데는 1~2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지진으로 허무하게 가족과 집을 잃은 이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이 지진으로 가족 5명을 한번에 잃은 미카일 굴은 <뉴욕 타임스>에 “나는 20년 동안 이 정부에 투표해왔다. 이제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분노를 말하고 있다.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가 지진 현장에서 만난 이들의 반응도 대동소이했다. 정부의 초기 대응이 충분하지 못했고, 구호물자 역시 효과적으로 배분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지진 피해가 심했던 카흐라만마라시나 말라트야 등에선 한정된 재원이 피해가 심한 곳에만 집중돼 그밖의 주민들은 상당한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이번 지진의 영향권에 든 지역은 튀르키예 81개 주 가운데 10개 주에 불과하지만, 유권자들의 표심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할 것으로 보였다.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이 편 ‘나홀로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지난해 10월 물가상승률이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85%까지 치솟는 등 젊은 계층의 생활고가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최대 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8일 “이 사태를 부른 책임은 에르도안에게 있다. 여당은 20년 동안 지진 대책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공세를 높였다. 2003년부터 튀르키예를 통치하며 철옹성 같은 권력 기반을 쌓은 ‘유능한 술탄’이라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명성에 결정적인 금이 간 것이다.

11시 낮(현지시각)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시 시내에서 복구작업이 한창이다. 카흐라만마라시/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튀르키예 재난위기관리청(AFAD)은 이날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현재 3만1643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시리아 정부가 보고한 사망자 수 5714명을 합하면 총 희생자는 3만7357명에 달한다. 재난 발생 7일째인 13일에도 드문드문 기적적인 구조 소식이 전해졌다. 남부 하타이주에선 13살 어린이 생존자가 182시간 만에 구조됐다. 튀르키예 국영방송 <티아르티 하베르>도 카흐라만마라시에서 10살 소녀를 구조했다고 보도했다. 구조대는 같은 지역에 있는 무너진 3층 건물 잔해 속에 갇힌 할머니, 어머니, 딸의 신호를 접했다며 연결 통로를 파면서 구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하지만 생존자가 더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은 옅어지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는 자연스레 무능한 정부를 향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구조대원들이 검은색 가방으로 주검을 나르는 광경을 사망자의 가족들이 바라보며 목놓아 통곡하는 광경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재난 지역에 물·식량·의약품·크레인 등이 부족하며 재난위기관리청이 지나치게 느려 효율적 대응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카흐라만마라시에서 가족을 잃은 쿠드시는 <로이터>에 “지진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지진 예방 조처를 하지 않아서 죽은 것”이라며 “딸 둘은 아직 실종된 상태이고 삼촌, 이모 그리고 이모의 두 아들을 땅에 묻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의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5월14일로 예고된 선거를 미룰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이날 “정치권에선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선과 총선 일정을 연기할 수 있다고 강하게 추측하고 있다”며 “전문가들은 지진과 투표 연기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물론이고 그의 경쟁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이자 위험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타이/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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