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하청 노조와 교섭하라는 사법부發 기업리스크

2023. 2. 1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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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분업과 전문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을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경영의 기본원칙의 하나이다. 기업은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경쟁력이 있고 수익성이 높은 업무는 스스로 하고 그렇지 않은 업무는 외주화하여 분업과 협업으로 처리한다. 그 방법으로 우리 기업은 파견과 도급을 많이 사용한다. 이에는 높은 정규직 노동경직성이라는 이유도 있다. 이 중 파견은 규제가 과도하다 보니 도급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도급 사용도 어렵게 되었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면서 하청 노조들이 하청 근로자 직고용과 원청 상대 직접 교섭을 요구해왔는데, 근래 법원에서 이 요구를 수용하고 도급 사용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7월 대법원이 포스코 사내 하도급 업체 근로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포스코가 이들을 직고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데 이어 금년 1월에는 서울행정법원이 CJ대한통운 하청 업체인 대리점 택배기사 노조의 원청에 대한 단체교섭 요구에 대해서 CJ대한통운이 하청 노조와 교섭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원청은 하청의 단체교섭 상대방이 아니다'는 기존 대법원 판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판결에 따르면 이제 기업의 도급 사용은 결정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도한 입법·행정 규제에 시달려온 우리 기업은 이제 심각한 사법리스크에까지 직면해 있다.

법원 판단대로 기업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계약관계도 없는 하청 업체 근로자의 사용자가 되어야 하고, 교섭이 강제되는 경우 도급 사용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하청 업체 입장에서도 원청의 직접 개입은 경영권의 핵심인 자사 근로자와의 계약에 있어서 자기결정권을 침해받는 것이다.

이 내용이 현실화되면 기업이 그동안 도급 시행을 통해 추구했던 경영효율성의 제고나 노동유연성의 확보는 물 건너가고, 생산성과 수익성의 저하로 국제 경쟁력 약화, 국내 투자 위축과 해외 탈출 가속화, 산업 공동화, 고용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해외 투자자에게 한국은 역시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인식을 강화시켜 투자를 외면할 또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수많은 하청 업체들은 경영권이 사실상 박탈됨에 따라 사업체 존폐의 위기에 처해질 수 있다. 결국 다양한 사업체로 네트워크화되어 분업과 협업을 통해 각자의 성과를 증대시키고 이를 통해 전체 볼륨을 키워나가는 현대 산업생태계의 붕괴가 초래될 수 있다.

더불어 노사분쟁이 상시화되고 노사관계의 사법화가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모든 하청 노조가 직접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게 될 뿐 아니라 하청 근로자들이 노조를 만들어서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고, 원청이 이를 거부하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식으로 줄소송이 발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원청과 하청 노조 간의 모든 이견은 결국 재판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노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율적 노사관계와 노사자치는 이제 사라지고, 모든 노사문제는 법원에서 결정하게 되어 노사관계의 사법화 경향이 고착될 수 있다.

국가는 치열한 국제 경쟁의 상황에서 우리 기업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주지는 못할망정 경쟁국보다 불리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사법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상급심에서는 경제와 노사관계를 고려한 합리적 결정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김강식 한국항공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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