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품 여기까지 안 와요” 튀르키예 변두리의 설움 [르포]

조해영 2023. 2.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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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대지진][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남부 말라트야 외곽마을
시내로 몰리는 구호품에 생존자 분노
영하 12도 추위에 천막·텐트 생활
추위·전염병·여진 2차 재난 노출
12일(현지시각) 튀르키예 하타이에서 남성 한명이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 잔해 앞에 앉아 얼굴을 파묻고 있다. 하타이/AFP 연합뉴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이 발생한 지 일주일이 꼬박 지났지만, 지진 발생 지역이 너무 광범위하고 피해가 커 정부의 손길이 속속들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선 정부의 구호물품 트럭을 볼 수 없다는 성토가 쏟아지며 희생자들을 향했던 깊은 슬픔과 애도의 감정이 무능한 정부와 이방인들을 향한 ‘분노’로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12일(현지시각) 찾은 튀르키예 남부 말라트야(말라티아)의 한 외곽 마을. 고층 건물이 속절없이 무너진 시내에 비해선 지진 피해가 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무너지고 금 간 집에서 잠들기 어려운 탓에 주민 대부분이 추운 날씨에 텐트에서 ‘한뎃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나마 온전한 집에서도 수도시설이 파괴돼 녹물이 나온다.

지난 6일 새벽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북부를 강타한 규모 7.8의 강진으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은 정부 재난위기관리청(AFAD)이 제공한 천막에서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에선 정부가 나눠주는 텐트가 부족해 마을 사람들이 부랴부랴 만든 천막이 임시 거처가 되고 있다. 집에 갈 수 없는 이들은 텐트 안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하루를 보낸다.

가장 큰 고민은 ‘추위’다.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진다. 밤이 되면 여자와 아이들은 텐트 안에서, 남자들은 차에서 잠을 청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텐트 안 난로에서 담배꽁초나 다 마신 생수통 등 온갖 생활쓰레기를 태울 수밖에 없다. 불가피한 선택이겠지만, 밖으로 이어진 연통을 통해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른다.

13일 아침 해가 떠오르자 골목에 주차된 차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듯 차에서 옷을 챙겨 입고, 더러는 그 차를 그대로 몰고 출근도 한다. 이 마을에서 공무원(동장)으로 일하는 도안은 “말라트야와 인근 아드야만은 산악지역이라 구호물품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시내 쪽 피해가 크다 보니 텐트나 구호물품도 우선 그쪽으로 몰린다. 여기선 구호물품을 실은 재난위기관리청의 트럭 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13일 아침(현지시각) 튀르키예 남부 말라트야의 한 구호 텐트에서, 지진 피해를 당한 다섯 가구 20명의 이재민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 텐트는 정부가 나눠준 것이나 수량이 부족해, 급히 만든 천막을 임시 거처로 쓰는 마을 사람들도 많다. 말라트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일주일이 지나며 희생자 수도 크게 늘었다. 튀르키예 재난위기관리청은 12일 이번 지진으로 숨진 이가 2만9605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시리아 쪽 사망자 3574명을 합하면 총 사망자 수는 3만3179명이 된다.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전세계 지진 피해 가운데 사망자 수 기준으로 여섯번째다. 이번 지진보다 희생자 수가 많았던 것은 2010년 아이티(22만2천여명), 2004년 인도네시아(16만5천여명), 2008년 중국(8만7천여명), 2005년 파키스탄(7만3천여명), 2004년 스리랑카(3만5천여명)뿐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2일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화상 기자회견을 열어 또 하나의 ‘우울한 수치’를 내놓았다. 이번 지진으로 인한 시리아 내 사망자 수가 현재까지 9300명에 이를 것이라는 수치를 밝혔다. 릭 브레넌 세계보건기구 중동 비상대응국장은 “시리아 정부의 영향권 지역에서 4800명이 사망하고 2500명이 부상했으며, 반군 영향권 지역에서 4500명이 사망하고 7500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된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 지역에 대한 접근이 이뤄지면서 사망자 수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며, 시리아 북서부의 알레포와 라타키아에서 약 35만명의 사람이 집을 잃었다고 말했다.

끔찍한 비극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과 허망함은 분노로 바뀌는 중이다. 아다나에서 만난 회계사 샤시네는 정부 내 “컨트롤타워가 보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역할을 해줄 사람들도 지진으로 많이 숨졌기 때문”이라며 “그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초반 며칠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버렸다”고 말했다. 도안과 주민들 역시 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한껏 예민해진 상황이다. 

튀르키예·시리아 강진 주요 피해 지역 중 한곳인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시에서 주민들이 13일(현지시각) 거리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한파를 견디고 있다. 이재민들은 정부 재난위기관리청(AFAD)이 제공한 천막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부가 나눠주는 텐트가 부족한 곳도 많다. 지난 6일 새벽 규모 7.8 강진이 발생한 뒤 일주일이 지나면서 희생자 수도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합쳐 3만3천명을 넘었다. 카흐라만마라시/로이터 연합뉴스

생존자들은 영하의 추위, 전염병, 추가 여진 우려 등 2차 재난에 노출돼 있다. 건물 잔해에 깔린 채 방치된 주검들이 식수를 오염시킬 수 있고, 이재민촌 역시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등 위생 문제가 심각한 형편이다. 식수와 식량이 부족하자 자연스레 약탈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무너진 집에 들어가 귀중품을 훔치고 금고를 터는 일, 상가에 들어가 생필품을 훔치는 일들이 이어지며 가뜩이나 예민하게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멍들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극히 위험한 신호도 감지된다. 이번 강진으로 끔찍한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동남부는 12년째 내전 중인 시리아와 맞닿아 있다. 일부 튀르키예 사람들은 ‘분노의 화살’을 시리아 난민에게로 돌리고 있다. 말라트야뿐 아니라 지진 피해 지역 곳곳에서 “범죄는 대부분 시리아 난민들이 저질렀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날 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 때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며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었다.

튀르키예인들은 성난 목소리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세기의 재난’으로 집권 20년 만에 정권을 잃을 위기에 놓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는 약탈자들을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키르 보즈다으 법무장관도 내진 설계를 하지 않은 건물 책임자 131명이 불려와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의 분노의 칼끝이 결국 어디로 향할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말라트야/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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