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통계, 우파는 약으로 쓰고 좌파는 독으로 쓴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3. 2. 1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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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국가 통계 작성 및 활용 실태’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지금까지 드러난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 및 왜곡 의혹만으로도 꽤 충격적이다. 소득 주도 성장, 일자리, 부동산 정책 등에 관련된 정부 통계를 조직적으로 ‘재가공’한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외부 유출이 금지된 비공개 통계 자료를 예외 규정 급조를 통해 청와대가 열람하기도 했고, 표본 선정의 졸속 변경이나 조사 숫자 임의 기입을 통해 이전과 아예 비교할 수 없게 하는 ‘통계 단절’을 시도하기도 했다.

통계는 근대국가의 필수 요소다. 국가(state)와 통계(statistics)는 어원을 공유할 정도다. 근대국가는 ‘지식 국가’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 과정에서 통계는 ‘공공 지식’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통계는 주로 계량적 정보를 의미하나 원래는 ‘국가에 관한 국가의 지식’ 전체였다. 19세기 말 개념의 수입·번역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정표’(政表)가 통계와 경합을 벌였는데, ‘국가에 관한 내용을 표로 만든 것’이라는 뜻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통계 장난’에서는 데자뷔(deja vu)가 느껴진다. 노무현 정부가 국가 통계의 품질 향상과 신뢰도 향상이라는 명분으로 통계법을 개정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 평준화와 징벌적 부동산 정책, 재정 지출 확대 등에 정권 나름의 색깔을 담던 ‘참여 정부’는 ‘통계 품질 진단 제도’를 도입하여 통계에 대한 정부 검열을 합법화하였다. 중요한 통계를 만드는 민간 기관을 정부가 통계 작성 지정 기관으로 선정할 뿐 아니라 해당 업무 개선을 핑계로 승인 취소가 가능하도록 법제화했다. 이를테면 정부의 통계 독점 의지였다.

이번에도 사고를 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소득 주도 성장, 관 주도 일자리 창출, 그리고 반(反)시장 부동산 정책이었다. 그 나름대로는 소신과 회심의 정책이었지만 현실은 기대를 크게 배신했다. 이에 정책 실세들은 ‘통계 재가공’으로 대응했다. 속담에 ‘넘어지면 막대 타령’이라 했듯, 잘못은 정책이 아니라 통계에 있다고 에두른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스스로 한 일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통계 왜곡이나 조작이 아니라 통계의 선택과 체계 개선이 있었을 뿐이라는 항변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정책 설계와 통계 교정을 동시에 하지 않았을까?

노무현·문재인 두 정부에서 벌어진 이런 식의 ‘통계 정치’는 정권 차원의 우연한 해프닝이 아니다. 대신 경제를 이념에 예속시키는 경우에 생겨나는 일반적 현상일 수 있다. 말하자면 좌파식 국가 통계 사용법이다. 지난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 대다수는 서강학파, 조순학파와 더불어 한국 경제학계 3대 학파 중 하나라는 진보 성향의 ‘학현학파’ 쪽이었다. 특히 소득 주도 성장 이론가들이 그랬다. 정권 말기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가 펴낸 책은 소득 주도 성장 이론의 뿌리가 자유방임 대신 정부 개입을 주장한 케인스이며 기틀은 그의 직계 조앤 로빈슨(Joan Robinson)이 만들었다고 명시했다.

케인스는 죽기 직전 시장경제론자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영국의 전후 경제를 구원하리라 기대하며 말이다. 그러나 로빈슨은 끝까지 열렬한 케인스주의자로 남아 미국식 시장경제를 저주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찬양했다. ‘코리아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좌파 계열 저명 학술지에 싣기도 했다. 당연히 그녀의 코리아는 남한이 아닌 북한이었다. 오늘날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자 최악의 통계 불량 국가 말이다. 명색이 경제학자가 선전용 통계 자료에 넘어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통계’가 ‘나쁜 정책’을 덮는 일이 사회주의 경제나 포퓰리즘 국가에서는 예사로운 관행이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통계는 없다. 궁극적으로 모든 통계는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장을 중시하는 자유 우파 진영에서는 가급적 통계를 약으로 쓰려고 한다. 당장 정치적으로 불편하더라도 장기적으로 국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부단한 통계 선진화 노력과 함께 말이다. 이에 반해 좌파 규제 애호가들은 정치적 목적 달성이나 이념적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통계를 곧잘 독으로 사용한다. 상습적으로 과장, 왜곡, 변형, 조작한 통계가 결국 경제 자체를 병들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번 감사원 감사는 단순한 통계 범죄 의심을 넘어 체제의 우열 및 선택 문제까지 포함하는 제법 심각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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