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드라마 ‘더 글로리’의 딜레마

2023. 2. 1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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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피해자 처절한 복수극 열풍
시청자들 파트2 고대… 예측 난무
‘해피엔딩’ 미학적·윤리 등 문제
약점 딛고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

‘더 글로리’ 파트2를 고대하는 이가 많다. 예측이 난무하고 파트1에서 복선을 찾았다 과시하는 유튜브 콘텐츠도 쌓이고 있다. 그것이 진짜 복선인지 맥거핀인지 파트2가 나와 봐야 알 것이다. 잘 만들어진 미스터리 스릴러에는 훌륭한 복선보다 더 훌륭한 맥거핀이 많은 법이다.

‘더 글로리’는 한 여자의 복수극이다. 그 여자를 송혜교가 연기한다. 복수와 전혀 무관할 것 같은 투명해 보이는 여자라서 복수의 역설이 더 짙게 전해진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복수의 역설은 복수가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에 있다.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다. 복수자의 유일한 정체성은 ‘복수’ 그 자체인데, 복수가 끝나면 자신을 채웠던 ‘복수’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복수하는 동안은 복수가 자신을 지탱해 주었다면, 복수가 끝나면 아무것도 없다. 비록 대상을 죽였다 하더라도 복수자는 그 대상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복수는 복수의 대상에게 의존하는 삶이다.

복수하려면 상대의 욕망을 알아야 한다. 상대가 욕망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 복수의 목적이 아니다. 욕망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 ‘나’의 욕망은 없다. 나는 복수 대상의 욕망을 욕망해야만 한다. 그의 욕망을 전유하고 역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복수의 필수 요건이다. ‘더 글로리’의 동은이 연진의 남편과 딸에게 접근한 이유다.

어떤 이가 복수 대상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을까. 한 번 죽었던 자만이 가능하다. 동은이 복수를 결심한 순간은, 죽기로 한 순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 번 죽었으니 못 할 것이 없다. 모든 걸 잃은 이는 죽음과 복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복수와 등가이다.

동은이 처음부터 복수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내 소원이 뭐였는 줄 아니? 나도 언젠가는 너의 이름을 잊고 너의 얼굴을 잊고 어디선가 널 다시 만났을 때 누구더라? 제발, 너를 기억조차 못 하길.” 그러나 망각은 불가능하다. 가해자를 망각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삶은 없다.

동은은 복수를 위해 18년을 준비한다. 복수의 네트워크를 직조한다. 예상되는 변수를 계산에 넣고 그 변수끼리의 화학작용도 예측한다. 그녀는 촘촘한 힘의 그물을 짜고 그곳에 복수에 필요한 인력을 배치한다. 그 인력은 자신을 도와줄 이가 아니다. 협박당해 동은이 지시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동은의 또 다른 적이다. 적으로 적을 치는 방식이 자본도, 권력도 없는 인간의 유일한 복수 방식이다.

복수를 시작했다면 그 대상을 죽이거나 온전히 힘을 빼서 다시는 재복수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애매하게 두면 복수의 복수, 거듭된 복수를 초래한다. 복수는 그 복수의 폐쇄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또 다른 목적이다. 그 고리에 자신의 희생도 포함된다. 동은은 자신이 만든 복수 시스템의 운용자가 아니다. 자신도 그 시스템 내의 한 변수다.

복수극이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복수극의 해피엔딩은 미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다. 맹목적인 해피엔딩은 오히려 사회의 폭력에 면죄부를 준다.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선하고 정의로웠으니 현실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위해와 폭력을 외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복수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딜레마에서 또 다른 해피엔딩의 길도 열린다. ‘더 글로리’ 파트2에서 동은 또한 복수의 딜레마에 봉착할 것이다. 복수하면서 자신을 잃는 것은 참을 수 있겠으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일은 참을 수 없다. 동은에게 “함께 칼춤 쳐줄 망나니”가 되겠다고 했던 남자 ‘여정’. 그녀가 복수에 집착한다면 ‘여정’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더 글로리’의 첫 번째 딜레마다. 두 번째 딜레마는 연진의 딸이다. 동은의 복수 시스템에서 가장 주요한 매개는 연진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악수였다. 동은은 그 어린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 덕분에 복수의 윤리가 생성된다. 동은은 분명 여정과 함께 칼춤을 출 것이다. 그 춤은 어느 순간 또 다른 2인무, 혹은 사랑으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동은은 복수의 정점에서 연진으로부터의 ‘분리’가 가능할 것이다. 더 이상 동은은 연진 일당의 삶 속에 갇힐 이유가 없다.

동은이 분리된다고 해서 연진 일당이 고스란히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파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멸하는 전도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더 글로리’의 유일한 해피엔딩은 동은이 복수를 끝마치는 것에 있지 않다. 연진을 비롯한 그들 자신의 파멸, 그 전복에 있다. ‘더 글로리’의 작가는 연진 일당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자멸하는지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줄 것이다.

복수는 사법 절차에 의존하지 않는 개인의 응징이다. 복수극의 유행은 사회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권력자는 복수마저 합법적으로 하겠으나, 약자는 자신을 파괴하면서 복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복수극의 개연성은 그 플롯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 시대 부조리가 복수극의 개연성 토대다. ‘더 글로리’ 파트2를 기다리는 마음에는 우리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각성이 담겨 있다. 윤리적인 복수극은 약자를 위하겠다는 권력자의 외침을 조용히 소외시키며 우리를 깊이 일깨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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