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죽음 내일로 이어지는, ‘다음 소희’ 막아야 해

한겨레 2023. 2. 13.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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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다음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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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다음 소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0건. 2021년 대한민국의 근로복지공단이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산재로 목숨을 잃은 현장실습생 현황을 파악한 숫자다.

다시 한번, 0건. 이 숫자에는 홍성대(19), 김대환(19), 김동준(19), 김동균(19), 이민호(19), 홍수연(19), 홍정운(19) 등 현장실습 기간 중 사망한 이들의 존재는 지워지고 없다. 2011년 현장학습제도가 시작된 이후, 매해 2~16명의 학생이 산재로 고통당하거나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 이름들을 다 알지 못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가려졌고, 정당하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통계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착취, 폭력, 상해, 죽음.

영화 <다음 소희>는 이 집계되지 않은 죽음을, 아니 어떤 숫자로도 충분히 집계되지 않을 생을 소희라는 인물을 통해 복원해 낸다. 소희는 고(故) 홍수연님의 삶으로부터 숨을 얻었지만, 이건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다음 소희’다. 한국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제의 죽음이 내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연쇄의 의미, 그리고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는 절박함을 담은 경고가 서늘하게 새겨져 있다.

‘불법파견업체’가 된 학교

특성화고 학생 소희(김시은)는 통신 서비스를 판매하는 대기업의 콜센터에 파견 실습을 나간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다지는 소희. 하지만 첫날부터 대면하게 되는 건 다짜고짜 쏟아지는 욕설과 엄청난 콜 수의 압박이다. 게다가 소희가 배정된 팀은 가입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설득해 어떻게든 서비스를 유지하게 만드는 해지 방어팀. 잔뜩 화가 난 이들이 수화기 너머 얼굴 없는 상담원의 기분 따위를 배려해줄 리 없다.

문제는 감정 노동만이 아니다. 매분 매초 퍼포먼스가 모니터링되고, 매주 성과가 수치화되어 등수에 반영되는 근무환경도 부담이다. 모멸의 최전선에 노동자를 던져놓고 아무렇게나 굴리며 방패막이로 삼다가 쓸모를 다하면 존재 자체를 손쉽게 삭제해 버리는 회사의 행태 역시 지긋지긋하다. 심지어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가져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던 회사는 각종 이유를 대며 월급을 깎고, 좋은 성과를 냈을 때조차 인센티브 지급을 미룬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움직이던 소희는 조금씩 생기를 잃어간다. 그의 몸에서 영혼이 1g씩 빠져나갈 때마다, 관객의 심장도 조여 온다. 도망갈 곳도 기댈 곳도 없이 영혼이 바싹 말라버린 소희의 마지막 선택은 동네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꽁꽁 얼어붙은 소희의 시신이 물 위로 떠오른다.

열아홉 소희의 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형사 유진(배두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단순 자살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마무리하려던 유진은 소희가 일하던 콜센터에서 또 다른 자살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무언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콜센터 팀장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조사는 콜센터 대표, 원청인 대기업 관리자, 학교 담임, 학교 교감을 지나 교육청 담당자로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해서 소희의 시신과 함께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은 사람을 갈아 먹고 녹여 먹으며 점점 비대해지는 성과급 사회의 거대한 위장이다.

원청은 하청을 성과로 압박하고, 대표는 팀장을 성과로 줄 세우며, 팀장은 성과를 쥐고 팀원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휘두른다. 성과란 ‘공평한 능력주의’라는 환상에 기대어 언제나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숫자로 환산되어야 하므로, 숫자가 되지 못하는 것들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의 건강을 살피고, 마음을 다독이며, 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노동을 가르치고 배분하는 일 따위는 사라진다. 관리자가 관리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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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진학률과 취업률에 따라 학교의 등급을 정해 예산을 지원하는 교육청, 인구절벽 사회에서 학생 유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학교, 학교에서 다시 몇명이나 취업시켰느냐로 평가받는 교사. 이 숫자의 시스템 속에서 학교는 유진의 말처럼 “불법파견업체”가 되어버렸다.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는 유진에게 “현실을 보자”던 장학사의 말은 이게 어디 학교와 파견 학생만이 경험하는 문제냐고 되묻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성과급 사회의 다른 한쪽에는 망가진 공동체와 쓸모를 생산함으로써가 아니라 주목을 끎으로써 자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주목경제가 놓여 있다. 직장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도 어디 한 군데 호소할 곳이 없는 태준(강현오)과 강압적인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없어 결국 학교마저 그만두고 먹방의 세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쭈니(정회린)는 이 ‘현실’을 증언한다. 노동과 안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학생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사업체, 그리고 구멍이 숭숭 난 현장학습제도를 손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생들의 죽음은 무너져 가는 한국 사회의 잔해가 새어 나오는 가장 약한 고리 중 하나일 뿐이다.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진 삶

러닝 타임 140분에 달하는 이 영화에는 누군가의 회상을 재현하는 플래시백이 등장하지 않는다. 과거를 보여주는 것은 오로지 기록 영상뿐이다. 소희가 떠나고 난 뒤, 그 영상만이 그를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의 기억이 된다. 그건 <다음 소희>가 영화로서 가지고 있는 자의식일 터다. 공통의 기억이 되지 못했던 소희의 삶을 영상으로 복원하고, 한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것은 이 영화가 자신이 다루는 사건의 무게를 오롯이 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소희는 누구에게 과시하거나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기는 것, 사랑하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 몇번이고 같은 춤동작을 반복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너무 늦게 만나게 됐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흘러가는 두 개의 시간성은 감독 정주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사적 장치였을 것이다. 배두나의 지연된 등장을 마주함으로써야, 한국 사회의 ‘이미 늦음’이 비로소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변화를 만들어 내는 영화와 기억의 힘을 믿고 싶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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